라는 이름의 나
철저하게
On-Line에서 적용되는
웹 상에서의 온라인이라기 보다는
합의하에 계속 어느 특정한 기간 동안
매일 눈 맞추고, 말 섞고, 같이 밥 먹고,
불편해하는 것을 보고도 모른 척 하는
“사이”들이
살아내는 특정한 (위도, 경도)에 적용되는
물리적 공식과는
무관하게
각자의 의식이 견뎌내는
자기장의 범위는
꽤
보다 자유롭고
보다 넓은 방식으로
다시 그 물리적 저항이
처리되는 차원으로
수렴했다.
아는 사람이 없는
시공간에서
나는 몇 장의 사용 가능한 신용카드를
소유한 눈에 보이는 개체로
인식되는 것 같았다.
혹은
신용카드 운반 개체 정도?
아는 사람이 있게된
시공간에서도
나는 꽤
다양한 방식으로
왜곡된 방식으로
나를 인지하겠다는 개체의
오만과 편견에 기생하여
그 인지 주체가 주체하는
카테고리에 의해
일반적으로 정의되었다.
그러면 나는
누구여야 하는데.
나를 가장 크게 왜곡하여 정의하는
주체는 가족들과 친구들이었고,
적절한 타인들은
나를 정의할 의도가 없기에
주민등록증이 증명하는 정도로
정의하고는 했다.
대체 누구의 내가 나이며,
내가 정의하는 내가 가장 합리적인
나라는 증거는
나도 나의 측근들이 거주하는
집단 의식 밖에서 살아본 적 없음을
우선적으로 인지해야 했다.
그러면 나는 뭐지.
이쯤되면
내가 나라고 나를 부르는 순간
모든 왜곡은 시작되는 것이었고,
이 모든 것들이 알만하더라도
나를 나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그 철저한 딜레마 속에서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나를 나라고 가리켜야 하는 데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누구냐고.
내가 좋아하게 된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 그 프레임에
즉시 내가 누구여야 하는 이유가 사라짐을
경험할 때.
나는 누구일 필요가 없었고,
내가 누구이고자 하는 건
철저히 내가 타인에게 투영한 나를
그 직접적 타인이 적절하게 반사하여
인지 부조화를 경험해야 할 필요가
비로소 없을 때,
그 질문의 가치까지 상쇄되는 건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나에 대해 니가 뭐냐고 물을 만한 시간은
돌아왔다.
내가
너를
만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365일의
시간을 상쇄하려면
몇 일을 더 살아야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이쯤이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두고
고심하던 시간마저
블랙홀로 빠지고 만다.
나는 너로 정의되는데
너는 나로 정의될 생각이 없는
그 절대 간극,
수지가 맞지 않았던
시공간도
같은 물리적 공간을
나눌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공통분모.
이제 그 분모의 값이 0이 되면
우리는 현재에 독립적으로 종속된
과거의 일부분이 되겠지.
누구여야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지만,
어느 누구로 타인에게 인지되든
나는 허구적 존재여야 함을
알만도 하지만,
결코 납득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짧게 살다 가는 인생
고작 비자가 만료되어서
누군가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대신하여
예정된 이별을
앞당겨주는 지도 모르겠다.
해석은
열린 결말을 남기고
결말은 또 다른 시작을
물고 나타났다.
둘 데가 없다.
몸과 마음을.
얼마나 아스러지게 그를 안아도
다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개체가 되는
저 사람을 아직까지는
아주 많이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