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녕로그 Mar 27. 2024

이상한 할아버지를 만났다

여자 혼자 여행할 땐 늘 경계해야 하는 이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일치기로 여행하는 작은 도시, 론다에 왔다. 3년 전 스페인을 여행할 때부터 관심 있던 곳이었던지라, 이번 여행 계획에선 0순위였던 곳. 내가 많은 것을 알고 있던 것도 아니다. 론다를 검색하면, 가는 방법도 뚜렷하지 않고, 절벽을 잇는 누에보 다리 주변만 언급될 뿐, 그 이상의 이야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껏 본 다리 사진들을 보며 혼자 이 마을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다리를 보러 가는 여정부터, 마을의 분위기 등등 모든 것들을. 흐릿하게 이어지는 상상 속 조각들은 이곳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숙소 앞 공원


말라가에서 오자마자 숙소에 짐을 내려두고 나왔다. 비가 계속 왔던 탓에 잠깐 쉬려고 했지만, 틈새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 그 사이로 뚫고 나오는 햇살을 보는 순간, 가만히 누워있을 수 없었다. 계획은 없었다. 체크인하면서 언급하신 숙소 앞 공원에 잠시 들르는 것뿐. 


생각하던 공원과 다른 모습이었다. 오히려 커다란 발코니라고 해야 할까? 네르하 바닷가의 유럽 발코니가 생각나는 곳이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공원 끝자락에 보이는 난간을 향해 걸었다.


난간 건너편 절벽


난간 너머로는 말 못 할 풍경이 펼쳐졌다. 좌우로 탁 트인 풍경에 얼떨떨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이었기에 그 감정은 더욱더 크게 다가왔다. 때로는 부족한 자료조사가 여행을 즐기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무지에서 온 날것의 감정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감동을 주더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자연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까마득히 먼 땅 밑에서부터 어디선가 떨어지고 있는 폭포 소리가 계속 위로 올라와,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면 그 소리로 귀가 가득 채워졌다. 신기한 건 고개를 난간 너머로 내밀어야만 들린다는 것. 마치 내 키보다도 작은 난간이 방음벽을 쳐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자연의 신비인가. 나는 어린아이처럼 신기함에 고개를 집어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이곳만 보고 돌아가려 했는데, 돌아가기엔 아쉬워 옆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공원 길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다 말고 풍경 감상을 하던 나에게 한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장우산을 짚으며 위태롭게 걷고 계시던 할아버지는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름답지 않니?"

스페인어였다. 나는 당황했지만 자연스레 대답을 했다. 이게 내가 바라던 스페인 여행이었으니까. 알고 있는 스페인어를 끄집어서 한 나의 대답 한마디에 스몰토크가 이어졌다. 기초 수준의 간단한 질문들에 하나하나 답을 하다 보니, 어느새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었다.


여자 혼자 하는 여행인지라 낯선 이에게 온갖 경계심을 품고 다니던 나는, 이 대화를 슬슬 끊고 가던 길을 가고 싶었다.  할아버지께서 말을 건네시는데 무시하고 휙 가버리기도 난처해서 서서히 대화를 마무리 지으며 옆으로 슬금슬금 걸어갔는데, 그런 나를 따라오셨다. 결국 그분의 발걸음 속도에 맞추어 나란히 길을 걸었다.


한 5분 정도 걸었을까, 갑자기 비가 거세게 쏟아졌다. 우산을 쓰려고 가방을 찾는 나를 보며 더 큰 우산이 자신에게 있다고 함께 쓰자며 펼치셨다. 돌이켜보면 그때 거절했어야 했다. 이미 스몰토크로 장벽이 조금 허물허진 나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여기 앉았다가 갈까? 비를 막아주잖아."

지팡이 역할을 하던 우산을 들고 걷는 할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러다 먼저 하신 제안을 판단할 시간도 없이 수락했다. 불편한 마음부터 떨쳐내려고.


문제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할아버지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더니, 나의 연애에 대한 관심을 계속 내비쳤다. 왜 처음 보는 나에게 자꾸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건지, 그저 불순한 의도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뭔가 싸함이 올라왔다. 나의 진짜 이성에 대한 관심 유무를 떠나서, 있다고 해선 좋게 들을 이야기가 하나 없을 거 같아, 무조건 NO로 대답했다. 


"왜 관심이 없어? 남자들이랑 만나서 노는 거 안 좋아해?"

지속적으로 묻는 질문이 점점 기분이 나쁘게 만들었다. 나는 싫다고 말을 했는데 왜 자꾸 묻는지. 전체를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아는 단어들을 조합해서 영어적 사고를 해보면, 이것은 분명 성폭력에 해당한다. 거기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이 추울 거라며 감싸주려고 하는 모습이 보이자 이곳에서 당장 도망칠 계획을 머릿속으로 세웠다. 더 있다간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표면적으로 보이는 쇠약한 할아버지 모습에, 오랜만에 이어지는 스페인어 대화까지 더해져 내가 너무 방심했다. 


공원 맞은편


스페인어를 더 못 알아듣는 척을 하다가 내 우산을 펼치고, 마지막으로 뒤의 일정이 있는 듯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갑자기 돌변할 태도에 대비해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 시간이 다 잘 때인지라 선택권이 없었다. 타국에서 혼자 여행하는 딸이 어떤 위험에 노출되었단 걸 알리는 전화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철이 덜 든 것 같은 마음에 속상했지만, 마음을 진정시키고 밤늦은 시간 오래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잠깐 사이에 벌어진 상황을 설명하다 보니 두려움이 커졌다. 내가 생각보다 많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말했단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인들과 대화를 하며 언어 공부하고 싶어 여행을 왔던 것이기에, 뜻밖에 주어진 기회에 신난 나머지 잠시 긴장을 풀고 많은 정보를 노출해 버렸다.


"할아버지 분장한 걸 수도 있어." 

거기에 엄마는 한술 더 떠 나에게 공포감을 줬다. 내가 아직은 안전하니 한 소리였겠지만, 그 말은 나의 상상을 자극시켜 버렸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언가에 쫓기는 듯 빠른 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까르푸 거리와 먹거리들


두려운 마음에 결국 전화를 끊을 용기가 나지 않아 계속 대화를 했고, 숙소에서 쉬다가 저녁 장까지 보고 돌아오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연신 미안하다고 말은 하지만, 차마 끊지 못했다. 무려 4시간이나 한 통화. 엄마는 내가 걱정되어 잠을 포기한 셈이다.


방심했다. 소도시에서 여행이 익숙해지면서 낯선 이들에 대한 벽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허물어지고 있었다. 혼자 여행할 때는 언제나 경계를 해야한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 경험. 상대가 순수한 의도로 말과 행동을 범했을지라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기에 사전에 처신을 잘해야 한다. 다시 여자 혼자 다니는 것에 대한 긴장감을 심어준 날이었다.





이전 23화 현지인처럼 먹는 아침 식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