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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로그 Apr 10. 2024

수수께끼 식사

내가 주문했지만 나도 내가 무엇을 먹는지 몰라요

습관처럼 공원으로 나왔다. 전 날 유일한 관광 명소인 다리를 원 없이 보았던지라, 하염없이 길을 따라 마을 깊숙이 걸었다. 사람이 모여있으면 그곳에 멈춰서고, 또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보니 감춰져 있던 론다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마을 안쪽에는 동양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흔하던 동양 관광객 한 명이.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오지 않을 만큼 중심지와 단절된 느낌이었던 다리 건너편. 그래서인지 당일치기로 주로 방문하는 동양인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이가 하나 없는 곳에 낯선 풍경까지 더해지니 여행에서 더 나아가 모험하는 기분이 들었다.


올드타운을 구분 짓는 성곽까지 다다르니, 동서양 관광객 모두가 사라졌다. 나는 성곽에 올라 그렇게 공허함이 도는 현지인들이 사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마을 끝까지 걸어와 그곳을 구경하는 데에는 목적이 하나 있었다. 식당 방문. 내가 하염없이 걷다가 쉽게 발걸음을 돌릴 것을 알았기에, 하나의 목표를 잡았는데, 그게 바로 식당이었다. 그곳은 구글맵에서 보이는 핀 중 마을 가장 깊숙이 위치해 있던 곳이다.


성곽에 서서 식당 방향을 바라보았을 땐, 의구심이 가득했다. 사람 한 명이 걸어가지 않는 집만 모여있는 저곳에 대체 무슨 식당이 있단 말인가.



결국 찾아갔던 그 식당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근처에 열려있던 유일한 식당 한 곳을 찾았다.


단골손님으로 추정되는 나이 지긋하신 손님들만 있는, 동네 호프집 같은 식당. 한편에 켜져 있는 스포츠를 술 한잔 걸치며 보고 있는 그들과 그 옆으로 멍하니 서 있는 셰프님. 동네 주민들끼리 모여서 휴식하는 공간이 아닐까 싶어 조심스레 눈치 보며 들어갔다. 나는 그저 누군가가 반겨주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뭐 먹을래?”

창가 앞 구석에 덩그러니 자리잡은 나에게 한 남성이 다가왔다. 식당 셰프이자 주인이었다. 그는 나에게 메뉴판도 주지 않은 채 물었다. 마치 내가 말한 모든 것을 만들어줄 수 있는 것처럼.


"메뉴 있나요?"

"내가 설명해 줄게."

그는 메뉴를 하나둘씩 읊기 시작했다. 그것도 스페인어로.


이 흥미로운 여정의 시작은 내가 사용한 틀린 어휘에서 시작됐다. 스페인에서는 La carta가 Menu고, Menu는 Menu del dia를 의미한다. (Menu del dia는 에피타이저, 본식, 후식, 음료가 10-20유로 선에서 제공되는 스페인식 코스 요리로 보면 된다. 매일 조금씩 메뉴가 달라지며, 몇 개의 선택지가 있다.) 나는 'Menu'라고 말을 했으니, 그에게 메뉴판이 아닌, Menu del dia를 물은 셈이다.


수많은 단어가 귀를 스쳤다. 거름망도 거치지 않고 거침없이 흘렀다. 그나마 들리는 메뉴 하나를 정했더니, 그리고 또?라고 묻는 그. 눈치보다가 메뉴를 하나씩 더 골랐다. 실내에선 휴대폰 통신이 되지 않았기에 번역기를 사용할 수도 없었고, 눈치가 최선이었다. 서로가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는 천천히 반복해 메뉴를 읊었고, 들리는 몇 개의 단어로 주문했다. 분명 알아들은 단어가 있었던 것임에도 나는 도통 무엇을 주문한 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토마토가 들어간 샐러드

버섯이 들어간 무언가

알 수 없는 마지막 음식


가장 두근거렸던 음식을 위한 기다림이 지나고,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다.



'커다란 토마토가 올리브에 푹 절여져 있다. 치즈가 간을 잡아준다.', '이건 버섯인가? 별로 안 좋아하지 않는 식재료만 있는데 생각보다 맛있다.', '버섯에 데리야끼 소스가 묻은 거 같다. 부드럽다. 버섯이 유명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구나.'


한 입씩 음미할 때마다 메모장에 음식에 대한 기억을 적었다. 식감, 맛, 식재료 등 내가 적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쓸데없는 말마저도 생각의 흐름 따라서.



음식을 세 가지를 주문했기에 최대한 다양한 맛을 보고자 양을 조절하면서 먹었지만, 배도 덜 고픈 상태에서 온 터라 두 번째 음식까지 모두 맛을 보고 나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배가 불렀다.


"다음 음식 줄까?"

"그건 안 줘도 될 거 같아."

"아니야. 맛은 봐야 돼."

내가 Menu del dia를 주문했다는 걸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을 때였고, 난 그저 음식 주문을 취소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이라도 줄 테니 맛이라도 보라며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렇게 받아 든 세 번째 음식. 소량의 감자튀김으로 덮어질 만큼 작은 고깃덩어리였다. 음식을 건네며 그는 나에게 천천히 쉬다가 먹으란다. 시간을 흘려보내 소화시키면서라도 제공하는 음식을 다 먹으라니. 명절날 고향집에 돌아와 행복하게 사육당하는 기분을 타국에서 느꼈다. 유럽에서 이런 정이 느껴지는 곳이 있었나?



"어디서 왔어?"

"한국에서요."

"앞에 앉아도 될까? 스페인어는 어디서 배웠어?"

아직은 느리고 어색하지만, 기본적인 소통이 가능해졌고, 반복되는 질문에는 자연스럽게 영어보다 스페인어로 답했다. 영어가 더 편해 보이는데도 꿋꿋하게 스페인어로 답을 하니, 내 이야기가 궁금한 듯했다. 그렇게 둘 사이 흐르는 어색함을 뚫고 대화가 조금씩 이어졌다. 카디즈, 세비야 등 앞으로 내가 갈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가 주였다.


"여기에 오늘 먹은 메뉴 좀 적어주실 수 있나요?"

가방 속에 꾸깃꾸깃하게 접혀있던 예약 종이 한 장과 샤프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지금까지 먹은 음식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낼 유일한 기회였다.


집에 돌아와 검색을 해봤다. 몇 차례 물어봤던 마지막 음식은 그제야 사슴이란 걸 알았다. 인생 첫 사슴고기. 특이한 향이 난다는 걸 인지해 익숙한 고기가 아닐 수도 있겠단 예상을 하긴 했지만, 너무 신선한 충격이었다. 무엇인지 모르고 먹은 음식에 대한 흥미도가 더욱 올라간 순간이었다.



식당 가게도 적어주고, 이유는 모르겠으나 싸인까지 해주셨다. 그들은 기억에 남길 바란다며 명함까지 건넸다. 그들의 친절함과 친근함은 나에게 엄청난 인상 깊은 여행을 심어주었고,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로 남았다. 이보다 더 만족할 수 없다. 그만큼 나도 그들에게 오래 기억에 남는 손님이길 하는 바람이다.


현지인 중에서도 진짜만 오는 식당에서 물음표 가득했던, 가성비 15유로 식사. 10년이 지나도 회자될만한 하루다. 동행이 있었다면 하지 않았을 여행 방식이었고, 또 그때의 패기가 없었다면 없었을 일이기에, 이날의 기억은 그 어느 때보다도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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