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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로그 May 08. 2024

스페인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은 숙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좋은 숙소를 찾았다

"알헤시라스 가세요? 숙소 잡으셨어요?"

발렌시아에서 우연히 만난 동행 A와 대화를 하다 우연히 그가 알헤시라스에 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시 알헤시라스라면 숙소 걱정으로만 가득했던지라 깊이 생각도 안 하고 곧바로 숙소부터 물었다. 알헤시라스는 관광지로써 알려진 도시가 아니기에 숙소 수부터 현저히 적어 선택지도 없이 예약한지라 불안함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여기 예약하긴 했는데, 평이 거의 없어서 어떨지 모르겠어요."

"좋으면 알려주세요."

그는 나보다 조금 앞서 여정을 시작해 알헤시라스를 한 발짝 빨리 가는 일정이었다. 그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예약해 놓은 숙소를 무료취소할 수 있었기에 작은 희망을 품고 그의 숙소 후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도착한 당일 그에게 연락이 왔다.

"할아버지가 호스트인데 숙소가 깔끔하고 너무 좋아요."


여자 혼자 여행하는 지라 남성과 둘이 한 집에 머무는 게 부담이 되었다. 각 방에 할아버지라곤 하지만, 세상은 무서운 곳이니까. 하지만 A가 사려 깊고 또 까다로운 사람이었기에 그를 믿고 곧장 예약을 바꿨다.


그렇게 오게 된 알헤시라스의 숙소.


침실과 그림


주소지를 찍어 건물 앞까지 왔는데 할아버지가 위에서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호세. 인자한 미소로 반겨준 그와 인테리어에 관심이 가득 담긴 모던하면서 앤티크 한 내부에 첫인상부터 만족도가 상당했다.


"차 한잔 할래?"

잠시 산책을 하고 돌아온 나에게 호세는 티타임을 제안했다. 평소라면 방에서 혼자 시간 보내는 게 좋아 멋쩍은 미소를 건네며 들어갔을 텐데, 유난히 그 제안은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짧지 않은 기간 혼자 여행하면서 현지인과 함께 어울리는 여행자들이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거실


햇살이 은은하게 들어오는 거실에 조심스레 자리 잡았다. 마치 남의 집에 초대받은 듯 어딘가 낯간지러워 엉덩이가 옴짝달싹 못했다.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따뜻한 차를 가져온 호세는 어색함을 뚫고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스페인에 있는지, 한국에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등 꽤나 많은 이야기를 했다. 영어를 잘 못하는 그와 스페인어를 잘 못하는 나. 장벽이 될 줄 알았던 언어는 예상과 달리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우리의 대화는 해가 저물 때까지 이어졌다.


영상 전공한다는 나에게 한참 집에 있는 이런저런 자료들 들고 와서 보여주던 그와의 대화는 힐링이었다. 옛이야기 건네주는 할아버지 모습을 보는 듯했달까.


타바코 피던 그의 부엌과 밤의 거실


어느덧 대화는 끝나고 정적이 흘렀다. 자연스레 말 수가 줄면서 공간에 흐르던 장작 타는 소리만 남았다. 우리는 그 소리 품 안에서 각자의 일에 빠져들었다.


그저 2D 화면이지만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과 그 소리, 아늑함이 감도는 따스한 조명, 숄을 두르고 흔들의자에 앉아 수첩에 무언가 계속 적고 있는 호세와 그 옆의 페이퍼 롤링 타바코. 어느 순간 눈에 들어온 이 장면은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아주 특별한 풍경은 아니지만, 내가 그동안 찾고 있었던 분위기였던 것인지 뇌리에 박혔다.


할아버지의 낡은 시계와 딥한 재즈 감성 사이 그 어딘가에 있는 이 분위기. 더 이상 할 일도, 할 말도 없었지만 이곳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차를 천천히 마시며 멍하니 앉아 시간을 최대한 보냈다.


아침식사 차리는 호세와 계란후라이


아침 식사도 정성스럽게 차려주던 호세. 이 집을 소개해 준 A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간단한 짧은 대화가 오갔다. 무엇보다 그가 먹는 아침식사를 그대로 나에게 함께 차려주는 게 너무 좋았다. 현지인의 진짜 식사를 함께하는 듯해서. 버터 위에 오렌지 잼을 바르면 바르는 대로, 계란을 올려먹으면 먹는 대로 그를 은근슬쩍 따라 식사를 했다.


"카메라 앞으로 메고 다니고!"

집을 나서는 손녀딸 챙기듯 옆으로 카메라 메고 나가려는 나에게 잔소리까지 하던 그. 언어장벽으로 깊은 내용까지 대화를 할 순 없었지만, 서로가 알게 모르게 많은 걸 공유했다. A가 남기고 간 후기 번역도 해드리고, 함께 A가 두고 간 걸로 추정되는 잃어버린 양말도 찾으러 가고, 평범하지 않은 사소한 일들을 경험하며 제법 가까워졌다.


이 숙소는 알헤시라스라는 곳에서 좋았던 기억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단순하게 '잠을 자고 머무는 숙소'라는 개념을 뛰어넘어 전후로 개인적인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곳이기에, 여러 이유로 자주 생각나는 곳이다.


행운으로 만난 숙소. 알헤시라스 지리적 특성상 다시 방문하기도 애매한 곳이지만, 사소한 것까지 좋았던 경험들은 이곳을 떠날 때까지 재방문을 다짐하게 했다.


호세, A! 언젠가 우리 모두 이곳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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