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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로그 May 29. 2024

여행 4주 차에 되찾은 여행의 이유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로 알카사르에서, 헤레스

유난히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 있다. 파란 하늘도 나를 달래줄 수 없는 그런 날.


무엇을 봐도 설렘은 없고, 몸은 지하 끝까지 가라앉을 듯 무겁고, 웃어보려 해도 입가에 미소조차 돌지 않았다. 특별히 나를 기분 나쁘게 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 기분이 그런 날이다.


흐릴 것으로 예상되었던 날 아침, 헤레스에는 오래 머무는 만큼 집에 여유로이 앉아 여행 정보를 검색하고 있었다. 여행 출발 전엔 계획도 없던 도시였던데다가 비교적 장기간을 할애했던 터라 정보 수집에 나름 심혈을 기울였다. 지루한 정보의 연속에 지쳐갈 때쯤, 예보와 달리 맑은 하늘을 보곤 헐래벌떡 집을 나섰다.


헤레스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보던 오늘 나의 감정은 평소와 조금은 달랐다. 기분은 좋지만, 무미건조했달까. 무언가가 나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유난히도 기계 같았다. 하늘이 맑아서 집을 나섰고, 나왔으니까 나는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이때 여행의 이유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여행을 진정 좋아하는 것일까?'

'억지로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려는 건 아닐까?'

'나는 여행을 왜 하려 했던 걸까?'


여행 4주 차, 익숙해져 버린 탓인지, '나'를 찾으러 온 여행이 현실세계로 돌아온 듯 자기 확신감을 떨어트렸다. 나 자신이 스스로를 속이면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솔직한 내면을 향해 끊임없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알카사르 앞 마차


알카사르까지 가는 동안 여행의 이유를 다시 찾아보려 할수록 기분은 좋지 않았다. 돈과 시간 모두 낭비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생각만 깊어져 갔다. 어쩌면 외국어로 타지에서 계속 생활한 데다, 혼자 하는 여행이기에 사람과의 대화 자체가 현저히 줄면서 마음이 지친 게 아닐까 싶어 한국에 전화를 해보기도 했다. 그게 하루를 힘들게 보내는 데 불을 지필 줄 몰랐지만.


"내 말의 의미는 그게 아니잖아. 왜 몰라!"

기분이 전화 너머로 다르게 전해질 리는 없었다. 이 방법은 꽤나 잘못된 선택이었다. 타인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생각한 것 밖에 되지 않았던 거다. 원했던 위로 대신 타이르기만 하니 화가 나고 속상해서 대화 중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에 자꾸 의존해서 뭐 해. 혼자 강하게 살아.'

이기적이었다. 당혹스러웠을 상대의 마음은 헤아릴 여유도 없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에 외로움만 느껴졌다. 홀로서기라며 세상 밖으로 나온 나의 의존적인 듯한 모습에 실망할 뿐이었다.


알카사르 외부


알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차오르는 눈물에 공원에 앉아 그저 울고 싶었다. 걸을 힘조차 나지 않았다. 이미 내 기분은 지하 저 밑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집에 다시 돌아갈까 수십 번 고민을 하며 발걸음을 계속 옮겼더니 알카사르 앞에 도착했다. 햇살 가득 머금은 나무와 마차를 지나 알카사르를 보니 이를 모른 체하고 돌아갈 수는 없겠더라.


알카사르


알카사르는 다른 지역에 비교하면 작았다. 그래도 전망이 늘 좋은 알카사르에 와 헤레스 주변의 풍경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이곳의 주변은 포도 농장, 올리브 짜내는 곳 등 와인으로 유명한 지역 다운 풍경을 갖고 있었다. 다른 곳과 비교하면 가시거리가 조금 떨어졌지만, 역시나 실망시키진 않았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흥미로웠던 건, 메스키타가 있다는 것. 과거 레콩키스타 영향을 이곳 역시 피해가지 못했다.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이슬람 양식을 보며 지난 여행동안 스페인 남부의 알카사르에서 얻은 조그마한 지식을 다시 기억에서 꺼내어 보며 둘러보았다.


이때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행을 온 이유가 이거 아닌가? 내가 원했던 '경험'이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집 안에 앉아 디지털을 통해 바라본 세상보다 더 오래 기억하고, 더 영감을 받기 위한 방법, 체득.


여행을 거듭하며 그 속에서 레콩키스타는 물론 이슬람 양식이 무엇인지 조차 모를 때부터 시작해 스페인의 역사를 알게 되고, 또 이슬람 문화에 대해 배워왔다. 생각 없이 기계처럼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는 내 생각은 틀렸다. 나름대로 무언가를 얻어가고 있었고, 돌이켜보니 그게 바로 내가 추구했던 것이었다.


알카사르 내부


지금껏 나에게 여행들은 단순하게 즐거움을 찾아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현실에서부터의 '도망'에서 비롯되었지만, 결국 '경험'을 좇는 것이었다. 꿈에 대한 고민이 담긴 여행이기도 했다. 그래서 여행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개인의 감정이 배제된 설계적인 여행일 때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굳이 힘들게 모은 돈으로 왜 고생을 선택했을까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기에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게 여행이란 걸 잘 알고, 그들에겐 공감을 전혀 할 수 없는 복에 겨운 소리인 것도 알았으니까. 그러면서 부러워하는 타인들과 힘든 나의 내면에 간극이 커질 때마다 기댈 곳이 없단 딜레마에 빠져 우울감이 커지기도 했다.


처음부터 그래왔지만, 이젠 '경험'에 더 깊이 집중을 해서 여행을 한다. 그러면서 부수적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한다. 알카사르에서 멍하니 서있으면서 느낀 게 이후의 여행에 많은 영향을 줬다. 내가 조그마한 지식을 얻어왔다면, 조금이라도 나의 생각과 행동에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면, 그것으로 여행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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