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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로그 Oct 25. 2023

용감한 쫄보, 떠납니다

'여행'이라 쓰고 '도망'이라 읽는 또 다른 여행, 프롤로그

혼자 여행을 제 발로 다녀온 쫄보. 이 말을 들으면 다들 묻는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을 여자 애가 혼자 다녀왔으면서 겁이 많다고?"

실제로 이 물음과 동시에 용감하단 말을 꽤나 들었다.


맞다.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를 쫄보라고 칭한다. 혼자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건, 고집을 꺾기 힘든 완강한 성격이 내재되어 있어서지, 세상에 두려운 게 없어서가 아니다.


왜 스스로가 낮추어 쫄보라고 칭하냐 묻는다면, 글로써라도 나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이다. 내유외강이면 좋으련만, 본인은 외강내유에 가까운 사람이다. 콤플렉스가 많던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나 자신까지 속이면서. 이번엔 진실을 인정하고 감정에 솔직해지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라 하겠다.


동물, 벌레, 귀신, 밤길, 돌발상황. 두려움의 대상이 될만한 모든 것은 두렵다. 가시거리가 떨어지는 밤이 되면 혹여나 무슨 일을 당하진 않을까 걱정하고, 내 몸집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작디작은 벌레가 눈앞에 지나가도 스트레스를 받을 만큼 무서워한다. 술도 한평생 밤새도록 취할 때까지 마셔본 적도 없다. 술이 싫어서라기보다 기억을 잃는 내가 두려워서.


꽤나 무덤덤하고 당당한 척 살아왔지만, 유리잔만큼이나 취약한 사람이다.



영국과 스페인으로 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가본 여러 유럽 국가 중 가장 다시 가고 싶지 않은 나라였다. 이전의 기억은 중요치 않았다. 한국을 뜨는 게 더 중요했다. 이전과 여행의 계기는 유사하다. 도망이다. 같이 살던 친구도 독일로 떠나고, 학기는 시작하는데 3학점에 온라인. 우울증에 폭식증 문턱까지 온 이 상황을 스스로가 극복할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비행기 표를 살 때 당시는 여전히 전 세계가 코로나 확진자 수를 업데이트하고 있던 때였다. 슬슬 미국과 유럽에선 이젠 감기로 고려하고 깊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뉴스가 등장할 때를 기회라 생각했다. 실제로 주변에 해외로 여행 가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던 시기. 하지만, 여전히 불안정했기에 부모님을 설득할 타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당시 공부하고 있던 스페인어가 적절한 핑곗거리가 되어 공부라는 명목으로 스페인 여행을 도모하게 된 것이다. 완강함을 보여주기 위해 경제적 독립된 여행을 선언하면서.


영국 프림로즈 힐


영국을 간 이유는 더 간단하다. 티켓 구매 당시 코로나로 인한 타격으로 사라졌던 스페인 직항 편들이 회복되기 전이었고, 스페인으로 가는 방법은 경유뿐이었다. 어차피 어딘가를 들러 가야한다면, 아예 그 국가를 제대로 둘러보고 싶었다. 그래서 IN-OUT을 모두 그나마 저렴한 런던으로 구매하고, 허브가 좋은 이점을 활용해 스페인 내 루트를 자유롭게 정했다. 개념은 조금 다르지만, 여행의 형태는 긴 스탑오버를 한 겪이다.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던 43일의 여행.

처음 계획은 최대 30일이었다. 스페인만. 영국까지 가기로 결정하고 일정을 조정하다보니 43일까지 늘어버렸다.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던 때라 마지막 장기간 여행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에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도시를 포기하는 것보다 시간과 돈을 더 투자하는 길을 선택했다. 굉장히 여유로웠다. 런던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는 중소도시들인데다 남들이 보내는 시간보다도 더 오래 머무르며 천천히 그곳을 음미하며 둘러보았다.


여행 일정 일부


여행 초반엔 막막했다. 뭔가 주문할 때 제외하곤 거의 말을 안 하니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동행을 구하면 되지 않나 싶지만, 감정적 소모가 두려워 적당히 만나고자 했다. 소도시들은 한국인이 없어서 구할 수 조차 없었고.


"힘들면 언제든 비행기표 바꿔서 돌아와"

나를 보내며 아빠가 했던 말이다. 외로움이 극대화될 때마다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그걸 이겨내고 싶었다.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가면 나는 조금만 역경이 와도 포기하는 게 익숙해질 거니까. 누군가의 품 안에서 곱고 편하게만 자라고 싶지는 않았다.


"50일까지 채웠다 갈까?"

"너 아빠가 엄청 기다려. 뭘 또 늘려. 다시 가면 되지. 그냥 돌아와."

마의 시기가 지나고 나니, 여행이 점차 빨리 흘러갔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적응이라는 게 무섭다. 본인만의 생활이 정착하고 나니 이보다 더 재밌는 삶이 없었다. 집에서 부모님이 애타게 기다리셔서 아쉽게도 처음 계획된 일정 따라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50일, 아니 60일까지 늘었을지도 모르겠다.



쫄보가 전하고 싶은 궁극적인 것은,

단순하게 겁 많은 누군가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 게 절대 아니다. 아시안, 여자라는 이유로 머나먼 타지에서 최약자 취급을 받기에, 여자 혼자 여행하는 것에 대해 머뭇거리고 있는 독자들에게 격려를 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이런 나도 했으니,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고. 누구에게나 기회는 열려있다고 전하고 싶었다.


냉철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닥치면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기 위해 행동을 취한다. 위기를 기회로. 이미 우리의 본능이다. 치안 같은 위험한 요소는 당연히 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다. 결국 모두 사람 사는 곳이고, 하지 말라는 것만 하지 않으면 어디든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또, 여행지를 접할 수 있는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소도시에 대한 관심도가 과거보다 많이 올라간 요즘이지만, 정보가 부족한 건 사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소도시 정보를 더 남기고자 한다. 특히, 스페인 소도시.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외에도 매력이 있는 곳들이 꽤나 있다.



서막을 올립니다.

이동하는 날 쫄보와 짐. 캐리어는 제외.


혼자라서 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혼자라서 한 것이 더 많았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소도시에 다녀오고, 중소도시에서 며칠씩 여유롭게 머물고. 발걸음이 가는 대로 가버리고, 일정을 멋대로 바꾸고. 스스로가 틀을 깨며 그 속에서 겪은 다채로운 일들이 소중한 경험이 되어 밑거름이 되었고, 나의 성장을 도왔다.


또, 혼자였기에 기억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메모장에 남겼다. 다시 서랍장에서 꺼내어 보지도 않는 기억은 강렬함을 제외하곤 모두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나 하나만 기억할 이 순간들은 휘발되고 변하기 쉽기에 기록하고 싶은 것은 그때 바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서랍장에 담아 둔 기억을 세상으로 꺼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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