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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로그 Nov 04. 2023

영국인도 우산 쓴다

누구든 비가 많이 오면 우산이 필요하다

영국 여행을 준비할 때 가장 먼저 챙겼던 물건이 있다. 바로, 우비. 수시로 비가 오는 것으로 유명한 런던에서 편안한 여행을 책임져줄 비장의 무기였다. 직접 비를 맞아보기 전까지는.


운이 좋게도 영국에서 머무는 동안 대부분의 날씨가 좋았다. 비와는 한참 거리가 먼, 최상의 날씨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드디어 비 예보가 떴다.


아침부터 야심 차게 우비를 챙겨 길을 나섰다.


퍼트니 브릿지 역


아침부터 열차를 잘못 타서 런던 외곽까지 나와버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오히려 런던 시내와 다른 분위기의 풍경을 봤다는 게 즐거웠다.


해맑게 이 사진을 찍는 순간까지 몰랐다. 모로코 발 황사의 영향으로 하늘이 노랗다는 걸. 포르투갈, 스페인에서 황사가 심하다는 걸 알았지만, 영국까지는 거리가 멀기에 사실 실제로 봤을 땐 황사라고 생각을 못했다. 묘하게 노란 것 같지만, 기분 탓이려니 싶을 정도였을 뿐.


그렇게 다시 방향을 잡아 본래 목적지였던 테이트모던으로 갔다.


밀레니엄교


전시 관람을 마치고 나왔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드디어 야심 찬 이 물건을 꺼낼 차례. 비가 그치기를 건물 안에서 기다리는 우산 없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당당하게 우비를 펼치며 나왔다. 다리 건너에 있는 세인트 폴 대성당까지만 일정을 생각하고 무작정 걸었다.


한 5분 지났을까, 밀레니엄교 위에서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비가 생각보다 너무 많이 오고, 카메라와 가방 모두 우비 안으로 넣으려 하니 우비가 한없이 작았다.


앞을 똑바로 보면서 걸을 수 없을 만큼 비가 꽤 왔고, 안개 때문에 가까울 줄 알았던 대성당이 보이지 않자 막막했다. 돌아온 길을 봤지만, 다시 가고 싶지도 않았다. 테이트 모던은 이미 봤고, 오늘의 남은 목적지는 대성당뿐이었으니까. 밀레니엄교에서 바라보는 대성당이 포인트인지라 더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오기에 위치도 애매하고.


'영국은 비가 와도 그냥 맞고 간다더니, 아니잖아?'

수많은 생각이 오가는 와중에 또 들었던 생각 하나. 비가 너무 자주와 우산을 안 쓰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 우비를 챙겨 온 것인데, 이게 웬걸, 지나가는 대부분의 사람이 우산 쓰고 되려 나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그렇다.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다. 우산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예기치 못할 때 비가 오면 안 쓰는 것일 뿐이다. 거리를 한참 걸으면서 둘러보니, 이런 날에도 우산이 없으면 비를 맞고 가긴 한다. 뛰지도 않고 여유롭게 걸어서. 이 날은 강수량이 많을 것이란 예보가 있어서인지 굉장히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세인트 폴 대성당 앞


밀레니엄교 건너는 사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버린 나. 다리 위에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우산과 가방만 사수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은 무엇이든 예쁠 수 없는 날씨였다. 유난히 잿빛인 하늘에 사방이 해가 이미 넘어간 듯 어두웠다. 이 와중에 대성당 앞의 벚꽃을 보니 잠시 기분이 좋았다. 뭐라도 특별한 걸 봤다 싶어서.


대성당을 지나 비도 잠시 피하고 배도 채울 겸, 식당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이 동네, 아시안식 프랜차이즈 아니면 없다. 그나마 열린 식당에 들어갔더니, 주방이 문을 닫았단다.


'이젠 집에 그냥 가고 싶어.'

무작정 큰길만 따라 계속 걷다가 든든한 식사를 할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는 걸 깨닫자 집부터 돌아가고 싶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가까운 곳에 지하철도 버스도 없었다. 어디로 가든 10분 이상은 걸어야 한다. 빗속에서 그만 걷고 싶은데!


비의 흔적들


얼굴에 흐르는 게 비인지 눈물인지. 필사적으로 지하철역을 찾아 숙소 근처로 돌아왔다. 종일 고생한 나에게 보상으로 조금이나마 든든하고 후회 없는 식사를 선물해 주겠다며 눈앞에 보이는 프렛과 마트도 들렀다. 이것마저도 고생을 선사했다. 이곳은 다수가 종이봉투를 쓰는 나라. 비에 젖어가는 모든 게 담긴 종이봉투는 5분 정도 거리를 걸어오는 사이, 순식간에 구멍이 났다.


숙소로 돌아와 방으로 올라가는 길에 거울로 마주한 내 모습이 기가 찼다. 짐 사수한다며 몸에 둘러서 두배로 커져버린 몸에 손에 들린 환타와 구멍 난 봉투. 거기에 원래 그랬던 듯 빈틈없이 젖어버린 바지 밑단.


무사히 복귀했으니 하는 말, 이것도 추억이다. 조금의 빗방울이라도 맞으면 예민해지는 난, 오늘도 나를 내려놓았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흠뻑 젖을 만큼 맞아보았고, 후회와 원망도 있었지만, 결국 즐겼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 한 가지. 비가 많이 오면, 영국인도 우산 쓴다. 그것도 장우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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