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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로그 Nov 01. 2023

세면대는 베이신

당황스러운 일상 속 영어 공부, 런던

"이거 왜 없어?"

살면서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세면대에 물은 점점 고여가는데 배수구 여는 법을 못 찾았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 마개를 직접 눌러도 보고, 주변에 돌릴 법한 건 다 건드렸다. 하다 못해 누르는 데에 힘을 너무 줘서 엄지손가락 뼈가 아플 지경. 아무리 두들겨봐도 꼼짝도 않더라.


문제의 세면대


여성에게 맞을 법한 작은 사이즈의 샤워부스 또는 이 작은 손 씻는 용 세면대. 이 둘 중 한 곳에서 세수를 해야 하는 상황. 샤워부스는 단순 세수만을 위해는 지나치게 불편함이 많아 이 세면대뿐이었는데, 배수가 안 되니 답답했다.


'고장 난 채로 방을 줬나?'

한 시간쯤 '영국 세면대'로 검색도 해보고, 유럽 여행자가 많은 카페에다가 질문도 적고, 온갖 방법을 썼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이걸 어떻게 닫았나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이미 닫혀있었던 것. 괜히 호텔 측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새벽 2시. 직원에게 물으러 가기도 애매한 때였다. 사실 급하니까 당장 갔을 법도 한데, 아까 올라온 가파른 계단이 귀찮아서 혼자 해결하려 했다. 미련하게. 솔직히 물어보기가 창피한 것도 있었다. 신문물도 아니고 평범한 세면대 사용법을 묻는다는 게 스스로가 황당했던 터라 더.


결국 작게 놓인 간이부엌 싱크대에서 대충 씻고 잤다.


"베이...신? 이거 맞아?"

그리고 다음날 오전, 전화를 결심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세면대가 영어로 뭔지 모른다. 잘 안 쓰는 단어이니 기억을 못 하는 거겠지 싶어 사전에 검색했는데, 이보다 더 낯설 수 없었다. 'Basin'. 척 봐도 세면대 같은 느낌도 안 들고, 어디서 본 기억도 없었기 때문. 평소 사전을 잘 안 믿는지라 수천번 의심했다. 괜히 소통에 오류가 생길까 봐. 상대가 못 알아들을 경우에 대비해 ‘세면대’에 대한 부연 설명할 방법까지 고민했다. 평소 완벽주의인 나는, 이런 상황마저도 하나하나 조심스럽다.


한참의 고민 끝에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줄래?"

"베이신? 베이슨? 베이진? 베이신! 얼굴 씻는 곳!"


"...옆을 눌러봐."

"아무것도 안 되는데?"

우려대로 세면대는 소통이 되지 않았다. 전화로 자신이 없을 때 느끼는 소통의 벽은 더 자신감을 잃게 만든다. 식은땀 흘리며 일어선 채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친절한 남성 직원의 목소리에 다시 마음을 잡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내 소통에 성공은 했지만,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다.


결국 방으로 찾아온 직원. 세면대 배수구 활용법은 당황스러울 만큼 간단했다. 1초 만에 해결됐을 만큼. 세면대 마개의 한 면을 누르면 납작한 원판이 빙글 돌아가면서 틈이 생겨 물이 빠지는 원리였다. 분명 마개를 가운데를 포함 주변까지 마구 눌러봤을 땐 안 됐는데. 기계가 고장 나서 전문가를 불렀는데 갑자기 멀쩡해진 그런, 황당함만 남았다.


멋쩍고 민망함에 직원을 향해 웃음을 지으며 ‘베이신'만 고장 난 로봇처럼 연신 뱉었다. 발음이나 고쳐 달라고.


"베이신!"

해맑은 미소와 한껏 고조된 목소리 톤이 인상적이던 직원은, 세면대를 가리키며 발음을 몇 번 짚어주곤 언제든 필요할 때 부르라며 인사하고 갔다. 이후 마주칠 때마다 한결같은 표정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세면대 때문에 내가 더 친근하게 느낀 탓인지 유난히 스몰토크도 많이 나눴던 그.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아직도 세면대를 알려주던 그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덕분에 세면대는 잊지 못할 거다.

영어로 베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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