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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로그 Oct 28. 2023

계단과의 사투

후회로 시작하는 첫 혼자 여행, 런던

약 12시간에 걸친 비행 끝에 영국이 보였다. 덴마크까지만 해도 날씨가 좋았는데, 영국으로 오니 순식간에 흐려졌다. 아, 런던에 왔구나.


점점 혼자 타지에 왔다는 게 실감나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 선택해서 온 여행인데 신기하게도 설렘보다는 비장함이 앞섰다. 잘 생존해서 많은 걸 경험하고 가자는 그런 다짐과 함께.


런던 항공샷


무난한 입국절차를 거쳐 지하철로 향했다. 모든 것이 유독 새로웠다. 영어로 적혀있는데도 길을 헤맸고, 익숙지 않은 영국식 발음에 언어가 통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혼자여서 그랬을까 유난히 어리바리하게 느껴지는 내 모습에 불안정했지만, 그래도 출발 전에 Paddington으로 가는 익스프레스 기차를 끊어놓은 덕에 시내까지는 무사히 도착했다.


이젠 숙소가 있는 Bayswater로만 가면 된다. 지하철로 단 한 정거장.


Earls Court 역. 내용과는 무관.


당연하게 매번 타온 지하철인데 역내에서 헤맸다. 아니, 짐을 들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 중이었다. 현실을 외면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다. 익숙하다는 듯 계단을 올랐지만, 그 덤덤함은 잠시. 올라온 계단만큼 다시 내려가야 것을 보고, 곁에 캐리어를 둔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욕심부려 무겁게 짐을 들고 온 나를 한없이 자책하면서. 그런 나에게 뒤에서 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도와줄까?”

“응?.... 응.”

반쯤 넋이 나간 채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두 손을 나에게 내밀며 캐리어를 들어주겠다고 했다. 이미 경험도 많고, 소매치기가 위험한 곳에선 절대 짐을 넘겨주지 않는데, 오늘은 달랐다.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에게 짐을 넘겨주었다. 20kg에 육박하는 캐리어를 번쩍 들어 옮긴 그는, 거듭 고맙다고 하는 나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만 건네고 사라졌다.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고 하더니. 이런 모습 때문일까?


그 덕분에 Bayswater까지 와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가는 길


“미안, 우리 엘리베이터가 없어.”

방 안내가 끝나고, 직원이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안타깝다는 말투로 한마디 했다. 유럽이 엘리베이터와 거리가 먼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지하철에서 이미 힘을 뺐던 지라 숙소에서 들은 이 말은 알고 있었으면서도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


숙소는 하필 3층. 유럽은 0층부터 시작하니 한국으로 따지면 4층인 셈. 가장 꼭대기 층으로 줬다. 게다가 런던 숙소의 계단은 지금껏 올라가 본 계단 중, 난이도 최상이었다. 높이 올라가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계단 자체가 폭이 좁고, 칸의 높이는 높은, 가파른 형태였다.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동행도 없으니 짐 봐줄 사람도 없고 모든 짐을 한 번에 들고 올라가야 했다.


나를 두고 계단을 홀로 오르던 직원은, 끙끙대며 올라가고 있는 나를 위에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굳이 나를 도와줄 필요도 없겠지만, 같이 계단을 가볍게 오르곤 남의 일이라는 듯 지켜보고 있는 그를 보며 약이 올랐다. 잘 올라가기 위해 여기서 불을 켜주겠다며 라이트 스위치를 누르고는, 안쓰럽다는 어투로 ‘어떡하니’만 반복했다. 그런 직원에 악에 받쳐 계단 앞에서 힘든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직원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웃으며 이 악물고 올라갔다.


방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 보기보다 더 좁고 가파르다.


그의 시야에서 벗어난 순간, 나의 이성의 끈은 끊어졌다. 숨을 돌리며 한 칸씩 차분하게 올라가려 했지만, 뜬 눈으로 장거리 비행을 한 직후인 터라 나의 체력은 바닥이었고, 인내심도 바닥났다. 끝을 모르고 가팔라지는 계단을 보며, 네발짐승처럼 올라갔다. 가빠지는 숨에 죽을상을 짓던 나는 결국, 복도 한가운데에 중요 물품이 가득 담겨있던 배낭을 내던지곤 캐리어만 들고 올라갔다. 어둠 속 빛만 쫓는 좀비처럼 온갖 문을 짚으며 다닌 끝에 방을 찾았다. 휴, 진짜 도착이다.


방을 보니 생기가 돌았다. 서둘러 배낭까지 수거해 돌아와 침대에 바로 몸을 내던졌다. 과도하게 힘을 쓰느라 순식간에 생겨버린 근육통 때문에 당장 누워야만 했다. 싱글 침대 하나 겨우 있는 고시원 같이 좁은 방에 몸을 뉜 채 높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조금씩 눈이 감기고 있는 와중 스쳐간 생각. 시작부터 심리적으로 움츠러든 모습에 몸까지 고생하고 나니 여기까지 왜 혼자 왔을까 후회가 됐다. 이전엔 힘들어도 함께 이 상황을 공감하고 나누며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서 이 힘듦을 모르고 지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 이 고생을 자처한 과거의 내가 원망스럽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잠시. 생각이 더 깊어지기도 전에 고단함에 깊은 잠에 빠졌다.


이후에도 숙소 계단은 언제나 나를 힘들게 했다. 맨몸으로 올라와도 힘든 곳이더라. 런던 시내를 걸어서 둘러보느라 2만 보, 3만 보를 걷고 돌아오면, 또다시 나를 네발짐승으로 만들었다. 주변 런던 숙소 후기를 보면, 런던의 집은 이런 계단 구조가 흔한 듯하다. 올라갈 때마다 등산하는 기분을 선사해 준 이 숙소 계단은, 다시 캐리어와 함께 내려올 땐 아찔함이 느껴졌다. 조금만 다리가 풀려서 헛디뎠다가는 그대로 목숨을 잃을 것 같아서. 덕분에 몇 층 안되지만 오가는 길은 상당히 여유로웠다. 계단 중간에 있는 거울에서 거울 셀카를 찍으며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어찌보면 여러 감정의 추억이 깃든 특별한 장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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