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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혁 Jun 02. 2024

거리

금요일 밤이었다. 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내가 사는 건물 앞에 누가 서 있었다. 가벼운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피부가 유난히 하얀 여자였다. 위치가 골목 안쪽이라 어쩌다 지나갈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으로 봤다. 잠깐 담배라도 피우고 들어가는 걸까. 여자는 계속 한숨을 쉬고, 몸을 비틀거리는 걸로 봐서 좀 취한 것 같았다.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자꾸 틀리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여자가 오래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혼자 집에서 술을 마시며 슬픔을 달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상상이었다. 아무튼 늦은 밤 으슥한 곳에서 모르는 여자 뒤에 서 있으려니 마음이 영 불편했다. 나는 나의 존재를 빨리 눈치채주면 좋겠다 싶어 은근 발소리도 내고 헛기침도 했지만,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적당히 거리를 뒀다. 다른 때 같으면 잠깐 산책이라도 하고 왔겠지만 그날은 피곤해서 여유가 없었다. 빨리 집에 들어가 씻고 싶었다. 여자는 몇 번의 시도 후에야 겨우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리자 마치 침대에 누워버리는 것처럼 건물 안으로 쑥 빨려들어갔다. 넘어져 머리라도 깨지는 건 아닌가 싶어 깜짝 놀랐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나도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짧은 계단을 비실비실 올라가 203호 앞에 섰다. 나는 202호에 산다. 전혀 몰랐는데 공교롭게도 옆집에 사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또 다시 문앞에 서서 도어락을 삑삑 누르며, 또 비빌번호를 틀렸다. 나 역시 또 여자의 뒤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작은 원룸 건물이라 복도가 무척 작다. 특히나 우리집과 옆집은 현관문이 바짝 붙어있고(거의 한뼘 정도 거리다) 문이 열리는 방향이 서로를 향해서 나란히 들어갈 수 없는 이상한 구조였다.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딱히 볼 것도 없으면서 뭐든 보는 척 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예전부터 몸을 못가눌 정도로 술에 취하는 사람이 싫었다. 기본적인 자제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보인다.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아서 그런 걸까? 어쩌면 대학 신입생 시절 술에 취한 친구를 부축하다가 계단에서 구른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학로였다. 그때 그 술집은 특이하게 계단에 난간대가 없었다. 2층에서 부축하며 내려오다가 계단 중간쯤에서 거의 뛰어내리듯 같이 떨어졌다. 1층 동기들 테이블 위로 우당탕 구른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책상과 의자가 넘어지고 그릇과 물컵이 사방으로 튀었다.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욱씬거렸는데, 그 와중에도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너무 창피해서 어쩔 줄 몰랐다. 연애는커녕 이성의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시절이었다. 아, 쪽팔려. 이러다 평생 연애 한 번 못해보고 죽는 건 아닐까? 다른 건 몰라도 키스는 꼭 한 번 해보고 싶은데... 좋아하던 여자애와는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 다른 사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연애를 했고, 그 사람과 첫키스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두 여자 다 어떻게 사는지 전혀 모른다. 그때 같이 떨어진 친구와는 지금도 가장 가까운 사이다. 평생 볼 친구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후로 둘이서 술을 먹은 적은 없다. 아무튼 인연이란 참 신기하다. 돌아보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흘러가버리는 게 인연의 특성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계획대로 되는 게 참 없다. 둘도 없이 가까워질 것 같은 사람과 싹뚝 자른 것처럼 인연이 끊기기도 하고, 전혀 관심없던 사람과 이상한 계기로 갑자기 가까워지기도 하니 말이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옆집 여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으음. 옆집 여자와는 어떤 인연일까? 몇 년이나 서로 모르고 지냈지만 말했듯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어쩌면 평생의 연인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경찰서에서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붉히게 될지도... 그러니까... 관계라는 걸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여자는 빳빳하게 서서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눈빛에서 두려움과 경멸을 보았다. 늦은 밤, 어떤 남자가 자기가 사는 건물에 쓱 따라들어와서 도어락 여는 걸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 뉴스에서 몇 번 봤던 이야기가 얼핏 스쳤다. 아니... 나는 당황해서 얼른 말했다. 

“옆집이에요.”

“네?” 하고 여자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나는 회초리에 맞은 것처럼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그러고보니 비염 때문에 마스크도 쓰고 있었다. 나는 마스크를 벗고 멋쩍게 웃으며 양손으로 우리집을 가리켰다.

“202호예요.”

여자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술 취한 사람 특유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저 202호인데, 제가 먼저 들어갈까요?”

“......네.”

나는 최대한 공손해보이도록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여자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우리집 앞에 섰다. 여자는 위험한 흉기를 피하는 것처럼 나를 쓱 피했다. 그래도 우리는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 있었다. 절대 잘못 누르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침착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어 재빨리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내 뒤로 여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죄송해요...”

“아니에요.” 하고 문이 닫혔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불꺼진 방에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몹시 피곤한 일주일이었다. 일도 많고 컨디션도 좋지 않다. 한동안 잘 지냈는데, 최근에는 어째 모든 게 뒤죽박죽인 느낌이다. 오늘 만난 친구 중 하나는 내게 보기보다 참 잘 산다고 했다. 다른 친구는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했다. 나는 어느 쪽도 동의하지 못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게 맞는가 싶었다. 방은 여전히 어둡고, 다만 창으로 스며든 거리의 미약한 불빛만이 가만히 점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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