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할리스. 1층 카운터 앞자리다. 방금 전까지 옆자리에 남자셋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절반이 욕설이었다. 친구 욕, 연예인 욕, 정치인 욕, 그냥 욕욕욕... 열심히 흘려 들었지만 그래도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욕을 하지 않는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왜일까? 왜 나는 욕을 하지 않을까? 많이 할 필요는 없지만 전혀 하지 않는 건 조금 이상할지도. 무엇이든 밸런스가 중요하니까. 시험삼아 머릿속으로 욕설을 몇 개 상상해본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겠다.
욕설 말고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 많다. 그런 것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두더지가 가져가서 땅굴 속에 고이 모셔두고 있을까.
졸린다. 잠이 쏟아진다. 부드러운 모래에 온몸이 감싸여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이다. 종아리는 묵직하고 허리는 뻐근하다. 머릿속은 바짝 말린 수건처럼 건조하다. 탈탈 털어도 나오는 건 먼지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글을 쓰라니? 머리가 전혀 안 돌아가는데? 내겐 그만한 능력이 없다.
그렇지만 쓰고 싶다. 늘 그래왔다. 잘 쓰기 때문에 쓰는 게 아니라, 쓰고 싶어서 쓴다. 나는 딱히 잘하는 게 없다. 그러니까 잘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고민할 일도 없다. 그냥 하고 싶은 걸 해도 괜찮다. 뭐, 돈은 안되겠지만.
인내. 인내로 글을 쓰자. 인내.
괴로움과 어려움을 참고 견딤.
나는 인내가 몹시 부족하다. 무언갈 참고 견디는 건 너무 힘들다. 그래서 나름대로 여러 방편들을 삶에 접목시켰다.
일단 괴로울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많은 걸 미리 예상하고, 대비한다. 마음의 준비도 자주, 많이 한다. 어려운 상황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고 예방주사처럼 스스로에게 주사한다. 그러면 실제로 닥쳐도 썩 견딜만하다.
또 기대치를 낮춘다. 무엇이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고, 괴로움도 크다. 기대가 작으면 실망도 작고, 괴로움도 작다. 생각해보면 높은 기대로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지 않나? 그저 잠깐의 도파민뿐. 오히려 무언갈 하는 데 방해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물론 이러면 기대가 충족될 때의 기쁨도 줄어든다. 그정도 댓가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잘 피한다. 괴로운 일이나, 어려운 일을 말그대로 피한다. 나는 피하는 게 어렵지 않고, 두렵지도 않다. 힘들고 싫으면 피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왜 항상 치열하게 맞서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나 자신을 뛰어넘어야만 하는가? 전부터 생각했는데, 나는 우물안 개구리라는 속담이 어떤 면에서 폭력적이라고 느낀다. 더 많이 아는 게 반드시 옳은가? 알아서 불행하고 몰라서 행복하다면 그냥 몰라도 되지 않을까? 모르면 잘못이라는 식의 개념이 조금 무섭다. 알고 싶은 사람은 노력해서 알아내고, 굳이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냥 모르고 살아도 괜찮은, 그런 너그러운 세상이면 좋겠다.
그러나 역시, 살다보면 모든 걸 다 피할 순 없다. 괴롭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 먹고 사는 문제. 돈을 벌기 위해 지긋지긋한 일을 기계처럼 반복해야 한다. 건강 문제. 아프지 않고 잘 살기 위해서 쓸데없이 무거운 걸 들었다 내려놓고(정말 바보 같다) 억지로 땀을 줄줄 짜내야 한다(이건 그래도 할만한데). 피곤과 졸음을 이겨내며 글도 써야 한다. ‘인내’ 같은 주제로.
그럴 땐 루틴을 적극 활용한다. 운동으로 따지면 저중량 고반복. 큰 괴로움을 잘게 부수어 여러 날에 걸쳐 분할 섭취한다. 나는 이쪽이 좋고 잘 맞다. 작은 노력으로 괴로움을 최소화하고, 꾸준한 반복으로 성과를 얻는 방식. 그게 제일 쉽고 힘이 덜 드는 방법 같다.
한때는 나도 남다른 삶, 특별하고 위대한 인생을 꿈꿨다. 영감을 위해 전쟁터로 뛰어드는 헤밍웨이 같은,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목숨을 끊은 다자이 오사무 같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 딱지처럼 툭 떨어져나갔다. 이제는 소박하고 단정한 인생이 좋다. 힘을 빼고 산다. 필사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단단한, 그런 사람, 그런 인생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