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에도 약속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열 시즈음 느즈막히 일어나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고 양치를 했다.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쳤다. 물때로 얼룩진 거울이라 내 얼굴도 얼룩덜룩했다.
침대로 돌아와 고양이처럼 이불 속으로 스르륵 기어들어갔다.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딱히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몹시 외로웠다. 온기와 손길이 그리웠다.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충전된 핸드폰에서 인공적인 온기를 느꼈다. 액정에는 커버가 붙여져 있어 지나치게 매끈했다. 그래서 연신 손가락을 움직이면서도 아무 것도 만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시덥잖은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머리를 비우고 삼십 분 정도. 어쩌다 당근 마켓에 들어갔다. 살 것도 없으면서. 엄지로 스크롤을 내려서 계속 새로고침을 했다. 나도 새로 고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문득 맨 위에 떠오른 새 글에 눈이 갔다.
‘중고 마음 팝니다’
가격은 10만 원. 내용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몰랐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문자를 남겼다. 물건 보고 결정해도 될까요? 곧바로 답장이 왔다. 삼십 분 뒤에 사거리 스타벅스에서 만나요. 2층 창가 자리에 초록색 모자를 쓰고 있을 게요.
나는 뭘 입어야 하지? 핸드폰으로 날씨 앱을 켰다. 기온은 아직 낮았다. 겨울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간절기가 가장 어렵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온도라는 건 거의 환상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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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시간 오 분 전에 도착했다. 아이스 라떼, 디카페인, 오트 밀크로 변경. 스타벅스 점원은 지극히 스타벅스적인 미소로 주문을 받았다. 나는 그런 걸 좀처럼 견디지 못한다. 아니, 잘 견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작은 생채기가 되어 내 안 어딘가에 조금씩 쌓여간다. 주문하신 디카페인 아이스 라떼, 오트 밀크로 변경하신 것 나왔습니다. 나는 커피를 들고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창가 자리에 초록색 모자를 쓴 여자가 앉아 있었다. 놀랄만큼 예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연애를 쉬지는 않았을 것 같은 느낌.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곧바로 알아보고 눈인사를 했다. 나는 그녀 맞은 편에 앉았다.
그녀의 앞에는 시커먼 음료가 놓여있었다. 이렇게까지 어두울 수 있을까 싶은 색깔이었다. 그냥 아메리카노 같진 않은데, 스타벅스에 이런 메뉴가 있었나? 물론 있겠지. 스타벅스에는 숨겨진 메뉴가 정말 많다. 그런 걸 다 알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시야가 닿는 정도만 알고 살 뿐이다.
“무슨 메뉴에요? 처음 보는 거 같은데.”
가벼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오 분 정도 침묵이 흘렀다. 나는 침묵이 싫지 않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침묵 속에서 말없이 오간 것들이 켜켜이 쌓여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 분 뒤에 그녀가 말을 꺼냈다.
“그 사람은 여행을 좋아했어요.”
그녀의 시선은 비스듬히, 책상 모서리에 가 있었다. 그 사선의 눈빛을 타고 무언가 스르륵 미끄러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특히 산을 좋아했죠. 나는 바다를 좋아하는데. 그거 알아요? 산을 좋아하는 사람과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만나면 절대 행복할 수 없대요. 잠깐 꿈처럼 만날 순 있지만 결국 끝이 나쁠 거라더군요. 그런 얘기를 하면 그 사람은 그냥 웃기만 했어요. 허허, 하면서. 별다른 말을 해주진 않았죠. 그런 근거 없는 이야기는 신경쓰지 말라든지, 걱정하지 말라든지, 우리는 다르다든지... 그런 말은 안해요. 원래부터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어요. 그렇지만 뭐랄까, 눈빛이... 그런 사람이 있거든요. 눈으로 말하는 사람이요. 생각이든 감정이든, 뭐든. 그런 거에 한 번 익숙해지면 잊기 힘들어요. 다른 사람을 만나면 실감할 수 있어요. 말은 그저 말일 뿐이구나. 눈빛도 그저 눈빛일 뿐이어야하는데 왜 말과 다르게 느껴질까요? 나는 그 사람을 알기 전까지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물론 내가 할 줄도 모르구요. 그건 뭐랄까, 사막에서 비를 만난 것과 같은 느낌이에요. 피할 곳이 없죠. 쏟아지면 맞을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녀는 휴지를 집어 입가를 한 번 닦았다. 시커먼 음료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나는 아이스 라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카페인을 마시면 잠을 못 자니까 디카페인을, 유당불내증이 있으니까 오트 밀크를 마신다. 누구나 결국 자기에게 맞는 걸 찾아가는 법이다.
“한 달에 한 번 보기도 힘들었어요. 연락하면 언제는 북한산, 언제는 관악산, 언제는 인왕산, 언제는 지리산, 언제는 수락산. 언제는 한라산. 아주 손쉽게 봉우리와 봉우리를 옮겨다니는 사람이었죠. 나는 한 번도 따라가본 적이 없어요. 데려가주지 않았거든요. 어떻게 한 번도... 그럴 수가 있는지. 그렇지만 서운하진 않아요. 이상하죠. 나는 욕심도 질투도 많은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는 한 번도 부려본 적이 없어요. 뭐라고 설명해야할 지 잘 모르겠는데, 그런 존재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어요. 같이 있을 때 나를 봐주는 눈빛에서 느꼈죠. 이 사람은 영원히 내 것이 아니겠구나. 아니, 그 누구의 것도 아니겠구나, 하는 식의.”
우리 테이블 곁으로 백팩을 멘 남자가 지나갔다. 그는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타이핑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조금씩 나른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사라졌어요. 마치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전화를 걸었는데 없는 번호였어요. 다음날 집에 찾아갔는데 텅 비었더라구요. 생각해보면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던 거예요. 이름을 알고, 사는 곳을 알고, 취미를 알고, 눈빛을 알지만. 그것 말고는 아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내게 남은 것도 없을 줄 알았죠. 실제로 그러니까요. 그 사람에게 받은 것도 없어요. 선물이나, 편지나, 흔한 꽃다발 하나도... 그래서 남은 거라고는, 그 사람이 내게 남긴 건.......”
그 순간, 그녀가 처음으로 몸을 움직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시커먼 음료를 들어서 창으로 있는 힘껏 던졌다. 창은 멀쩡했지만 유리잔은 산산조각이 났다. 검은 액체는 점도가 꽤 있는 편이었고, 그래서 끈적한 먹물처럼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녀는 느긋하지도, 또 성급하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아주 선명하게 멀어져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을 쳐다보았다. 밖은 몹시 밝았다. 한낮의 태양... 화창하게 개인 날씨 탓에 거리엔 햇빛이 빈틈없이 가득차 있었다. 나는 어두운 창가에 앉아 창에 비친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의 얼굴을, 나의 눈빛을, 그냥 쳐다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