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리에서 만난 입 다문 이 수많은 사람들도
모두 살아오면서 몸에 밴 저마다의 빛깔이 있다
아직도 찾지 못한 나의 빛깔은 무엇일까
산에서도 거리에서도 변치 않을 나의 빛깔은.
도종환 [빛깔]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면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살면서 충분히 감사해야 할 일들 중 하나임이 틀림없음을 느낀다. 푸르른 하늘과, 땅 위에 서있는 형형색색의 것들. 모든 존재는 저마다 색깔을 지니고 있다. 고백하자면, 나는 남들보다 적은 수의 색깔로 세상을 바라보는 적록색약이다. 살아오면서 큰 불편함은 없었다. 적록색약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나서 곧바로 이어지는 “너 신호등은 볼 수 있어?”로 시작되는, 수십 번도 넘게 들은 질문들 빼고는. 궁금할까 봐 미리 답하자면, 난 면허도 있고 신호도 잘 본다.
내게 보이는 세상에 대해 쉽게 말하면, 초등학교 미술시간을 떠올릴 수 있겠다. 색칠을 하라고 선생님께서 테두리만 있는 스케치를 주시면, 나는 12색짜리 색연필로, 다른 친구들은 모조리 24색 색연필로 다채롭게 칠하고 나서 남들의 그림을 지켜보고 있자면, 별 차이 없어 보이는데 수행평가 점수는 내가 더 낮은 기분이랄까. 다소 손해 보는 느낌은 있다. 인터넷에서 색약이 보는 세상이라면서 일반인의 세상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시야를 비교하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같이 그림을 보고 있던 친구들에게서 느껴지는 신기하다는 반응에는 머쓱했으나 다소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에게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를 몰라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냥 선천적으로 이렇게 태어났고, 내가 가진 12가지의 색연필로도 충분히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색에 대해 거짓을 고하면 금방 들키기 때문에, 내가 보이는 세상과 이에 대한 내 감상은 누구보다도 솔직하다. 오히려 동정하고 싶은 건, 모든 색이 보이면서도 본인의 색을 숨기던 이들이었다. 나는 어릴 적 양면 색종이를 오려 붙이면, 바닥에 붙어 보이지 않는 면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분명히 그 시절 친구들에게는 화려한 그들만의 색깔이 존재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양면 색종이처럼 저마다 무채색의, 눈에 띄지 않는 색을 겉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마치 원래 가지고 있던 색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양면이 다 나이기에, 반대쪽 면이 숨겨져야 할 이유는 없을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바라보는 그들과 나의 시야가 이제는 꽤 비슷해져 버렸다.
심지어 어떤 친구들은 반대쪽 면을 깎아내기도 했다. 그들은 ‘무언가’가 되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조각칼을 들고 사정없이 본인을 내려쳐 기어코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아마 그들은 몰랐으리라, 깎고 남은 것이 내가 아니라, 깎아내던 것이 본인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무언가’가 되는 데엔 성공했지만, ‘나’가 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사실을. 단면 색종이가 되어버렸음을.
빨강에도 다양한 빨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난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모든 빨강에 대한 감상을 느낄 수 없다. 그래도 나는 내가 보이는 만큼의 빨강이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믿는다. 내가 지켜본 모든 사람들도 그렇다. 본연의 색깔을 환하게 드러내고 있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 함께 있을 때 서로가 배경색이 되어 어우러지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각자의 색깔이 아름답지 않은 색이라는 궁색한 핑계로 이어질 수는 없다. 다들 본연의 색으로 활짝 폈으면 한다. 그래야 내 눈에 보이는 세상도 조금이나마 더 많은 색으로 설명될 수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