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환점

Halfway point

by 나무섬

또 하루가 가고 내일은 또 오고 이 세상은 바삐 움직이고

그렇게 앞만 보며 걸어가란 아버지 말에 또 한참을 울고 다짐을 해보고

어제 걷던 나의 흔적들은 푸르른 하늘 위로 나의 꿈을 찾아 떠나고

난 고집스런 내일 앞에 약속을 하고 매일

미생 OST 한희정 [내일] 中


시간 낭비, 돈 낭비, 감정 낭비… 사람들은 낭비를 싫어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낭비되는 것은 없다. 내가 지금껏 겪어 온 모든 시행착오들은, 내 스물다섯 개의 나이테 안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가져왔던 무수한 의문에서 출발해서, 수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이에 대해 직접 내린 결론들이 둥그런 원을 그리며 나를 에워싼다. 수 년째 나를 이루어낸 것들은, 이런 물음표에 대한 느낌표의 과정이었다.

매일이 하나의 페이지라면, 내 인생은 필히 여러 권의 일기장이리라. 모두가 그렇겠지. 인생은, 적어도 내가 이해한 선에서는 단면이 아닌 입체적으로 구성된다. 그러니까 타인의 한쪽만을 보고 판단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역시 마음먹는다고 해서 완벽하게 지켜지는 일은 드물다. 우리는 때로 한없이 편협해지기도 하고 삐쭉하게 날이 서서 남을 찌르기도 한다. 어김없이, 찌르고 난 뒤엔 십중팔구 후회만이 남는다. 선이 모여 모서리가 생겨나듯이, 내 뾰족한 모서리도 그대들의 선(善)으로 감싸주기를. 내 부족한 부분을 이해해주기를.

우연히 예전에 살던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꿈 많던 초등학생의 나, 어딘가 움츠러들어있던 중학생의 내가 학교의 풍경과 함께 스쳐 지나간다. ‘미안, 나는 네가 바라던 그런 어른은 못 되었어’라고 생각하며, 멋쩍게 웃는다. 종종 불량식품을 사 먹고 친구들과 오락기 앞에 둘러앉아 놀던 ‘하나 문구점’, 아플 때마다 약보다는 맛있는 영양제를 받으러 가던 ‘정우약국’, 시험을 망치고 기분을 풀기 위해 잔뜩 시켜먹던 ‘정이네 떡볶이’ 집도 보인다. 오랜만에 걷는 골목마다, 내 소중한 추억들이 방울방울 맺혀있다. 과거는, 사뭇 비슷한 모습을 한 채 이십몇 년의 시간 동안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기억 속 가게 아주머니들께서는 어느새 하얘진 머리로 나를 반긴다. 그새 주인이 바뀐 곳도 있었다. 나는 고개만 끄덕이며 시간의 무게를 체감한다. 그 시절 나와 함께하던 친구들, 우리는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영원히 젊을 것만 같던 우리도, 어느새 어리숙하게 다들 나이를 먹었다. 이제 우린 드디어 나잇값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항상 그래왔듯이 우리가 지나온 세월보다 한 발자국씩 뒤쳐질까.

연말이다. 봄과 가을이 사라져서인지, 점점 한 해가 저무는 속도가 빨라지는 듯하다. 형누나들에게 반 오십이라며 놀리던 어린 녀석이 어느새 그 나이가 되어 우뚝 섰다. 세월이 지나가는 속도가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 같다던 어떤 작가의 말이 스쳐간다. 생각 없던 신입생 시절의 나보다 발걸음이 딱 오 년만큼 무겁다. 어느덧 순수하게 하고 싶은 것들을 하던 시절이, 붕어빵 4개에 천 원 하던 시절만큼 퍽 그립다. 앞으로만 나아가면 되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 잠시 멈춰선다. 그러다가 그냥, 생각을 바꾸어 반환점을 도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지금까지의 나와 다시 마주하고, 놓고 갔던 그 마음가짐을 챙겨 다시 새로운 나이테를 새길 준비를 한다.

첫눈 오는 날처럼 순백으로 뒤덮였던 내 마음. 고백컨데 그 위에 난 작은 발자국들이 내 세상의 전부였던 적이 있다. 하염없이 걷다 보니 주변에도 어느새 나와 같은 발자국 투성이. 난 그렇게 운명처럼 우연처럼, 다시 세상 속에 섞여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