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으로 아수라장이 된 도쿄의 봄, 기회를 만들다
한밤 중 알람이 울린다.
지진 발생 경보 알람이다. 자다가도 흔들리는 침대를 경험하는 일은 일본 생활 1년 만에 익숙해졌다.
일본 열도가 지진이 빈번한 섬나라라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지만 그와 더불어 지진 대비 태세는 물론이고 내진 설계가 세계 어느 곳 보다 잘 되어 있다는 점도 익히 알고 있던 덕에 이 정도 강도 즈음이야 하고 가볍게 넘기는 구석이 있었다.
일본에서 지진을 처음 경험하던 날, 지진 알림 어플리케이션을 휴대폰에 깔았다.
도쿄는 물론, 일본 전역에서 발생하는 지진에 대한 소식을 실시간으로 받는 어플이다.
그리고 지진이 발생하는 날이면 발생 진도와 여진에 대한 정보를 바로바로 업데이트 해 주어, 지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대비 가능한 태세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도 했다.
그렇게 도쿄 생활 동안 자잘한 진도의 지진은 내게, 가끔 전철이 늦게 오는 정도의 일상의 불편함 정도로 느껴졌다.
헤세이 23년, 그러니까 2011년 발생했던 동일본 대지진을 경험하기 전까진 말이다.
2011년 3월 11일 금요일 오후 14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후 근무에 한창이었다. 본사와의 연락을 취하며 동시에 담당하고 있는 도쿄 호텔로 연락을 걸며 주말 전 해야 할 예약 건을 마무리 중이었다.
내일이면 금요일이고, 완연한 봄은 아니지만 친구들과 도쿄 나들이 계획도 미리 세웠다.
그리고 일주일을 잘 마무리 한 기념으로, 4시간 뒤면 난 칼퇴를 하고 동료들과 한잔 할 예정이다.
오후 14시 45분
방금 걸려온 전화 응대를 하고 있던 때였다. 갑자기 모니터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그 흔들림은 책상까지 미세하게 흔들어놓기 시작한다. 옆 동료들의 자리에서 작고 큰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고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다급한 소리들은 우리와 다를게 없었다.
지진은 5분이 지나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진도의 강도가 점점 세지더니 책상을 거세게 흔들었다.
여태까지 만났던 지진들은 크던 작던 5분 이내에서 멈추곤 했다. 아무런 피해가 없는 채로 말이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일단 대피해야 하는지 멈추길 기다려야 하는지 모른 채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던 우리는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겨 5분 이상의 지진이 멈추길 기다렸다.
그러나 책상 위의 물건들이 하나둘씩 바닥으로 떨어질 정도로 진도는 점점 강하게 오기 시작했고, 그 순간부터 설마 큰 지진이겠어하면서 늘 있던 해프닝 정도로 웃어넘기려 했던 웃음기는 싹 사라지고 공포감이 슬며시 밀려왔다.
잠깐, 이거 진짜야?
평소 정기적으로 빌딩 전체를 대상으로 대피 훈련들을 해 왔지만 설마 써먹을 일이 있겠냐고 방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오늘 써먹게 되었는데 다 소용이 없다.
몇 번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훈련했던 내용이 하얗게 백지가 될 정도로 인사불성이 되어 하나 둘씩 탈출을 시도했다. 탈출을 시도하던 그때도 6층 건물 중 4층이었던 우리 사무실은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우린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으리라.
건물 밖으로 나오자 근처 회사원들이 일층에 모여 웅성웅성 거리며 다 우리 같은 얼굴들을 하고 한차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지진을 알리는 알람이 여기 저기서 울리고 다들 전화와 메시지를 돌리며 가족들과 지인들의 안전을 묻느라 정신이 없다.
탈출하느라 정신이 없어 실내화 그대로 나온 사람들, 그 와중에 철두철미하게 비상용 안전모과 식량 가방을 다 들고 나온 사람들. 우리 모두 건물이 없는 곳에 모여 이게 진짜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때를 기다렸다.
오후 15시. 뉴스에서 공식적으로 지진 특보를 다루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연이어 지진 속보가 나오면서 동일본 도시별 상황들이 보도되었다. 그때부터 카톡과 라인 및 일본 통신사들은 이례 없는 접속 과다로 막히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몇 시간 동안 연결이 되지 않아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실기간으로 소식을 전할 길이 막혀 버렸다.
그 시각 지하철은 물론 지상을 달리는 전철은 모두 일시 중지되었고 그 시간부터 우리의 업무도 일시 종료되었다.
그러나 아직 여진의 위험이 있는 상태라 공원에 대피 한 시민들은 다시 건물로 복귀할 수 없는 상황에 발만 동동 굴릴 뿐이었다. 다행히도 지갑을 들고 나온 시민들은 앞다퉈 물이나 열량이 높은 비상식량을 구입하기도 했고 각 회사마다 이후의 지침에 대해 공원에서 작은 회의를 열기도 했다.
오후 17시. 여진이 조금 사라진 시각 우리 회사 사람들은 다시 건물로 복귀해 짐을 챙겨 나왔다.
그리고 주말에 더 있을 여진과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고 비상연락망이 적힌 종이를 주고받았다. 혹시 발생할지 모를 사건을 위한 작은 종이 하나였지만 뭔가 영화를 보는 듯, 꿈을 꾸는 듯 아직도 이 상황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시 거리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전철이 다시 재개한다고 하는 방향 쪽으로 서둘러 걸어가고 있다.
무사 귀가를 꿈꾸며 그러나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안전모와 비상 가방을 챙겨서 말이다.
가족들이 있는 동료들도 그 무리에 합류해 귀가 방향을 잡았고 지하철 역에 도착하더라도 그 인파에 밀려 전철로 고생해서 도착하느니 몇시간이고 걸어 가는게 나을거라거 뚜벅이를 자처한 동료들도 각자의 집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 것도, 걸어갈 거리의 집도 아닌 몇몇의 동료들과 함께 일단 놀랜 마음을 추스르고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함께 이자카야에서 밤을 새우기로 했다.
어쩌면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 재회할 때까지의 시간이 걸리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과, 집으로 가도 혹시 올지 모를 여진으로 공포스럽게 보내기 싫었던 핑계가 한잔 두 잔 더 기울이게 했을지 모른다.
3월 12일 오전 5시.
몇 번의 작은 여진들을 보낸 새벽, 기사로 전철 재개 소식을 접했다.
다시 카톡이 이어진 밤동안 우리들은 한국에서 걱정했을 가족과 지인에게 연락을 드렸지만 아마 이 상황을 겪고 있는 우리 만큼 잠을 못 주무셨을 테다. 그곳에서 확인하고 볼 수 있는 건 사건의 심각성을 다루는 기사가 메인이 될 테니까 말이다.
함께 수다를 떨며 앞으로의 일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평소의 금요일 밤처럼 농담도 나누면서 우리들은 평소와 다름없을 주말을 보낼 준비를 마쳤다. 보통 금요일 보다 조금 더 노곤한 몸으로 말이다.
잠시 휴업할게요.
월요일 아침 브리핑은 평소보다 무거웠다.
사장님의 지시 아래 큰 화면의 텔레비전이 사무실 한편에 마련되었고, 실시간 보도되는 지진 속보들과 쓰나미 영상들 그리고 원전에 관련된 속보들과 방사능 뉴스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근무를 이어갔다. 금요일 오후의 지진은 생각보다 큰 재난이었다.
더불어 우리의 일에도 지장을 받았다. 본사에서 들어오는 도쿄 관광 예약 손님을 주 메인으로 일을 하는 지사였던 만큼 '도쿄 지진'으로 인한 회사의 피해와, 파트너 호텔들의 피해도 막심했다.
그리고 연이어 터지는 사건들로 그 피해들은 다른 산업들까지도 뻗어나갔으며 각 외국 대사관들은 자국민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추천하는 문서를 공표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동일본은 (알게 모르게) 휴업과 같은 분위기가 조성된 셈이다.
실제로 뉴스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재난상황을 다뤘지만 무엇보다 이 지진으로 마음을 다친 쓰나미 피해자들을 위로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후쿠시마 지역에서 모든 삶의 흔적들을 놔두고 도망 나와야 했던 지역민들은 시간이 한 참 지난 후까지도 뉴스와 다큐 등에서 다뤄지곤 했으니 나처럼 가족의 품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은 그저 그들의 심신의 조금이나마 회복이 되길 기도할 뿐이었다.
우리 회사는 직원들에게 유급과 섞어 쓸 수 있는 최대 2주간의 무급 휴가를 쓸 수 있게 해 주었고, 나를 비롯한 몇몇 동료들은 한국을 다녀왔다. 동네 가까이에 사는 선배가 공항 가는 길목에서 배웅을 해줬는데 그날 먹는 밥이 도쿄에서 먹는 마지막 만찬이 아니길 바란다는 염원에서 쏘는 거라고 생색을 냈지만. 착잡했던 선배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처럼 바캉스를 떠나는 케이스도 있었지만 그중에는 귀국을 준비하는 동료들도 있었으며 바캉스를 계기로 귀국 정리가 되더라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몇 주간의 휴가를 마치고 다시 돌아온 도쿄는 봄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 집은 고요했고 늘 그랬듯 서정적인 동네가 날 반겼다. 한번 정리가 되고 남은 동료들도 각자의 몫으로 회사를 이끌어갔고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다.
현관문에 늘 상비된 안전모와 비상 식량이 든 가방을 빼면 말이다.
4월 5일, 스물일곱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다시 돌아온 도쿄에서 보내는 생일인 만큼 더 행복했고 더 특별했다. 바캉스 동안 복귀를 반대하는 부모님을 설득시켰다. 겨우 나의 1년을 가득 채워 얻은 기회였는데 지진으로 내 의지와 열정을 꺾어 버리기엔 너무 아쉬웠다. 위험을 눈앞에서 보고도 겪고도 다시 복귀하는 딸이 야속했겠지만 그랬기에 더 열심히 하겠노라고 다짐했던 그 해의 생일이었다.
나는 전직을 결심했다.
전직 사이트에 등록을 했다. 조금 더 경력을 쌓고 준비하려고 했던 전직이었으나 이 사건이 시기를 조금 더 앞 당기게 했다. 여행업계라 천재지변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일에 대한 동기부여를 뺏어간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일본 기업을 목표로 했던 취업이었기 때문에 전직을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하나 더.
지진으로 귀국한 외국인들의 공석이 꽤 많을 거라는 확신이 나를 발 빠르게 움직이게 했다.
여러 헤드헌터들의 눈에 띄게 일본 대기업, 중소기업 리쿠르팅 회사를 비롯, 외국계 기업 전용 리쿠르팅 사이트까지 내 이력서와 직무 경력서를 뿌렸다.
내가 하고 싶은 업무는 마케팅과 인사, 영업 쪽이었지만 직무는 배워서 익혀도 무관하다는 생각으로 관심 있는 직무는 다 지원했다. 헤드헌터들의 연락이 하나둘씩 오기 시작했고 몇몇 담당자들은 직접 면담을 원하기도 했다. 하루 일과가 끝난 저녁은 물론, 반차를 써가며 면담과 면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전직의 벽은 높았고 최종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으며 어떤 회사는 서류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헤드헌터만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라며 리쿠르팅 전시회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을까.
한통의 우편을 받는다. '귀하의 합격을 축하드립니다'라고 적힌 편지를 보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일본은 내정(內定)을 받으면 먼저 우편으로 통보를 하는 관습이 있는데 그걸 받고 진짜 일본 회사에 취업했구나를 실감했다. 내가 오르지 못할 곳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의 연속이었고 일을 하면서 몰래 전직 활동을 했던 탓에 심신이 지쳐가고 있었으니까, 그 편지 한 통은 그야말로 내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듯했다.
그렇게, 기쁨의 순간을 부모님께 알리며 나는 또다시 이곳에서 도전을 시작해 보겠노라고, 축하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그 해 초 여름 메구미라는 이름을 그 달아준 그 회사와 작별을 했다.
Enny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지메 마시떼(はじめまして)
애니또모우시마스. 도우조 요로시쿠 오네가이 이따시마스
(エニー と申します。 どうぞ宜しくお願い致します)
한국인은 나 밖에 없는 일본 회사로 출근한 월요일 아침. 똘망하면서도 긴장한 폼으로 Enny(애니)라는 이름으로 나를 소개했다.
그렇게 또 다른 도전의 레이스가 시작 된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