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작업실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스타벅스에 가서 펼치는 13인치 노트북이 내 작업실이 된다. 여행을 갈때는 백팩에 나만의 작업실을 챙겨 어디서든 그림을 그린다. 거북이처럼 등에 작업실을 매고다닌다.
LA행 왕복티켓을 끊고 퇴사를 하고 친구집에서 카우치서핑을 하러 떠나던 날이 생각난다. 가진 것 없었지만 양손가득 24살의 낭만이 흘러내렸다. 몇달간 여행하기엔 돈이 부족할 것 같아 서둘러 일을 구했고 운좋게 일러스트 외주미팅을 착수한 채로 미국에 갔다. 친구가 수업을 가면 나도 밖에서 벤치에 앉아 한달 넘게 그림을 그렸다. 대책은 없지만 해맑았고 배짱은 두둑했다. 미국의 명절인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다행히 돈이 들어왔다. 처음으로 클라이언트의 요구만이 아닌 내가 좋아해서 그린 그림을 백만원에 팔았다.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었던 것 같다. 그 돈을 들고 애리조나까지 달려 자동차 로드트립을 갔다. 20시간을 넘게 사막을 달리는 동안 기름값이 비행기티켓보다 비쌌지만 무모했던 여행이 즐거웠다. 애리조나에 사는 친구를 만나 모두 같이 열기구를 탔다. 그 날의 여행은 꼭 한 여름밤의 꿈 같았다.
캘리포니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고 친구집에서 잠깐 얹혀지내며 일을 새로 구해야 했지만 걱정이 되지 않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과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살고 싶다는 밝은 믿음이 생겼다. 여전히 내 백팩엔 노트북이 있고 여행을 갈때면 언제나 거북이 등처럼 함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