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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성평화지킴이 Dec 03. 2019

[역사 기행] 100년만에 이어진 독립항쟁의 길

뾰족한 지붕이 인상적인 3.1운동 만세길 방문자센터로 들어섰다. 홀로 센터를 지키고 있던 아저씨가 곳곳을 보여주며 열성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1919년 3월 1일, 일본제국의 점령과 폭력에 항거하여 벌어졌던 전국적인 만세운동에 대해 화성이 가지고 있는 기억에 관한 얘기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로 나섰는지. 아저씨는 벽에 새겨진 독립운동가 156개의 이름과 앞으로 밝혀져 벽에 새겨질 무명의 독립 운동가들을 얘기했다. 

아저씨의 설명에 푹 빠져 만세길을 걷기로 했다. 3.1운동 당시 화성의 독립 운동가들이 태극기와 함께 걸었던 길을 복원해놓은 이 둘레길은 장장 31km나 되는 거리였다. 하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었고 아침밥도 든든하게 챙겨 먹었으니까! 아저씨는 손바닥만 한 여권을 챙겨주며 길 곳곳에 놓인 스탬프함을 찾아 도장을 찍어오라고 했다. 스탬프함이 어디 있는지는 어떻게 아냐고 물으니 씩 웃으며 대답했다. 

“빨갛고 파란 리본을 따라가면 됩니다.”     


빨갛고 파란 리본을 따라 

길을 걸었다. 만세길은 작은 마을들을 가로질러 굽이굽이 나 있고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빨갛고 파란리본이 길을 안내했다. 마치 노란 길을 따라 가는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었다. 도로시가 오즈를 찾아간 거라면, 100년 전 사람들은 이 길 끝에 무엇을 찾아 걸었던 걸까?

녹음이 무성한 길을 따라 마법처럼 100여년의 시간을 거슬러 간다.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두렵고도 뜨거운 마음으로 걸음을 내디뎠던 그때로. 그 걸음은 당시 일제 폭압의 상징이었던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를 무너뜨리고 화수리 주재소에 다다를 때까지 더욱 커지고 강인해졌다. 불과 몇 십 명에 지나지 않았던 독립 운동가의 수는 화수리 주재소에 이르렀을 때 2천여 명까지 늘어나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자그만 화수 초등학교가 들어선 주재소 터를 바라보며 변변한 무기 하나 없이 농기구를 들고 걸었을 2천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최진성, 차희식, 차병혁. 이름이 남은 독립 운동가들과 이름마저 남지 못한 독립 운동가들을 떠올리고, 두렵고 무서운 상황에서도 그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했던 그들의 염원을 생각해본다. 

“그 분들 덕분에 이렇게 걱정 없이 사는 거지.”

독립운동가 차병혁의 생가에서 만난 할머니는 주름 진 미소를 지어보였다. 낡은 마루에 걸터앉아 부채질을 하는 모습이 아주 오래 전부터 그 곳에 있었던 것처럼 편안해보였다. 그녀를 바라보며 문득 다가온 깨달음은 너무 뻔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이 평화로운 모습이 그들의 염원이야. 이 일상을 되찾기 위해 옛날 수많은 사람들이 두렵고도 뜨거운 마음으로 희생의 길 위에 섰던 거야.     

마지막으로 들렀던 수촌교회에는 들꽃과 들풀이 가득했다. 초가로 복원한 교회 안에는 1919년 당시 일제의 보복으로 교회가 불탔을 때 간신히 구해낸 궤짝이 놓여 있었다. 이제는 쌀 뒤주로 쓴다는 목사님의 말에도 기어코 열어본 그 속에서 곱게 개켜진 태극기 하나가 꿈을 꾼다. 억압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꾼 작은 마을에 이제는 쓸 일이 없어진 두렵고 뜨거운 태극기.     


곳곳에 평화가 숨을 쉬는 마을들을 지나 마침내 만세길 끝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 대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보이나요? 그대들의 길 끝에 가득한 평화, 그대들이 염원하던 바로 이 빛나는 평화가 보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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