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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리 Jun 16. 2023

궁금한 나의 24시간

엄마는 오늘 뭐했냐는 질문이 곤란해

일 학년 꼬마의 학교생활이 몹시 알고 싶다. 잠자리에 들기 전 참지 못하고 질문을 쏟아낼라치면, 아이는 성에 차지 않게 몇 마디 하곤 ‘맛 좀 봐라!’의 기세로 똑같이 되갚는다.


“아빠는 오늘 회사에서 뭘 했어?”


회의를 했다 하면 어떤 회의를 했냐 묻고, 기획서를 썼다고 하면 그게 뭔지 캐묻는다. 왜 썼는지, 뭘로 썼는지, 대답의 꼬리를 무는 재간이 보통이 아니다. 면접을 방불케 하는 문답. 너희 잠은 안 잘거니.


“그럼 엄마는 오늘 뭐 했어?”     


대답 잘하자. 아빠보다 초라해 보이지 않게.     


“엄청, 어엄청 바빴지. 너 학교 데려다준 뒤에 이불빨래를 세 개나 했어. 설거지도 여러 번 하고 청소도 하고, 또…….”

“엄.마. 그거는 집안일이잖아. 집안일 말고 다른 거는?”


뜨끔하다. 여기에만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그날 오전 집안일을 한 뒤, 오후에는 침대에 그냥 누워있었다. 기운이 없는 날이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간간이 눈을 떠 벽에 붙은 시곗바늘을 확인했다. 하교 시간, 스친 거울 앞에서 다시 입꼬리를 올리고 교문 앞에 가 섰다. 등록한 수업에 가거나 모임에 가는 날도 있기는 하다. 그런 날 좀 물어봐주면 좋으련만.


“어…. 책도 읽고 공부도 했지. 그리고 윤아, 집안일도 엄청 중요하고 오래 걸리는 일인 거 알지?”     


내가 또 오해는 못 참지. 뒷말에 힘을 잔뜩 준다. '또 저런다'의 의미로 남편이 들릴 듯 말 듯 하게 웃는다.




나의 오전은 집안일과 소소한 가계 경영업무만으로 눈 깜짝할 새 지나간다. 남편이 ‘1인 경영지원팀’이라고 부르는 그 업무는 주로 생필품과 소모품 구매, 납부할 지출 확인, 가족 일정 조정이다. 회사 다닐 때는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몸이 낀 채 했던 일들, 그러다 몇 가지 구멍이 생기던 일들. 남편과 정신없이 분담하던 그 일을 이제 혼자 식탁에 곧게 앉아 행정실 직원처럼 처리한다. 간단해 보여도 시간을 꽤 잡아먹는다. 줄여보려 해도 잘 안된다.


집안일은 또 어떤가. 그것은 해도 티가 안 나는데 안 하면 티가 많이 나는 것. 쉬지 않고 움직였으나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어 가족이 눈치채지 못하는 것. 시간과 노력이 짠할 새 없이 도돌이표가 되는 것. 끝없는 체인. 이를테면, 세탁기 버튼을 누르고 청소기를 손에 쥐면 바닥에 늘어진 것들이 보여 다시 놓고 각자의 자리를 찾아주는 것. 다 된 빨래를 건조기에 넣으려 할 때면 먼지통을 비워야 하는 것. 버리려 보니 쓰레기봉투가 꽉 찬 것. 버리고 와 새 봉지를 채우려니 없어서 또 사야겠다 생각하는 것. 설거지를 마친 뒤 비로소 끝냈다의 의미로 커피를 한 잔 마시면 설거지통에 새로운 컵이 하나 놓이는 것. 휴, 썼는데도 여전히 생색이 안 난다.


가끔은 도서관에서 아이가 주문한 책들을 가방 가득 빌려 낑낑 옮겨 둔다. 하교 이후는 학교-집-학원-놀이터를 데리고 오가는 것으로 묘하게 하루 만 보 걸음을 채우는 시간이다. 냉장고 식재료와 선반 간식거리를 채우고 없앤다. 궁리해 저녁 식사도 요리한다. 일견 대단할 것 없어 보이는 일들로 집이 잘 돌아가도록 바둥거린다. 할 일 잡동사니를 한 줄 한 줄 쓰고 취소선을 그어, 눈으로 증명되는 것들에 보람을 얻는다.


연락이 닿는 지인들의 '뭐 하고 지내냐'는 인사에 딱히 할 말이 없다. '애 학교 보내고 데려오면 하루가 끝나.' 거기에 '요즘엔 글도 쓰고 있어' 정도가 최선. 고된 회사생활에 지친 워킹맘 친구가 휴직을 꿈꾸며 '어서 빨리 너의 즐거움을 말해달라'는데, 미안해, 나는 이렇게 오늘을 어제와 같이, 내일을 오늘과 같이 돌보며 살고 있어. 멋진 셰프의 요리가 아니라 슴슴한 콩비지같은 날들이야. 아, 하나 더 생각 난 것은 마음속에 화가 많이 줄었다는 것 정도. 쓰고 보니 그게 가장 중요하고 큰 것 같기도 하네.


물어온 이들도 대단한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이와 지인들에게 더 멋진 답을 해 보고 싶긴 하다. 미래의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 다시 회사로 돌아가기 전 나는 무엇을 했노라 말할 수 있을까.


- (1월 초에 적어 둔) 올해의 계획-

1. 나와 가족의 건강. 체력을 키운다.

2. 커리어와 취미를 확장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을 가꿔본다.

3. 지속 가능한 워라밸을 위한 시스템을 만든다.
    (초1 스스로 할 수 있는 생활/학습 습관, 친구 만들기)

4. '살 곳'을 확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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