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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리 Jun 24. 2023

밥은 언제나 우리의 고민이었지

그래서 점심은 뭐 먹을 건데?


점심 먹으러 멀리 간다 생각하기. 출근의 정신승리법 중 하나라며 온라인에 떠도는 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건 진정 평일 한 시간여의 밥때가 직장인의 보편적인 낙이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는 회의에 지쳐있다가도, 엑셀 창의 가로 세로를 뚫어지게 보다가도, 시계의 짧은 침이 11에 가까운 것을 본 누군가 “그래서 점심은 뭐 먹을 건데?”를 외치면 모든 의제가 썰물처럼 물러난다. 법인카드 덕에 팀원들과 골라보는 고가의 메뉴도, 대화가 잘 통하는 동료와 먹는 떡볶이도,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일부러 택하는 샌드위치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무언가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 건 작년 무렵이다. 식사메이트였던 편한 이들이 이직과 휴직, 사옥 이전으로 점점 사라졌다. 연차가 늘어나며 받아들여야 할 변화인가. 밥이야 조금 불편한 차장님들과 먹어도 상관없다고 애써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에 좀 더 현실적인 이유가 더해졌다. 맛집이 즐비한 회사 근처에서는 한 끼에 만 오천 원이 우스워진다. 커피라도 마시면 이만 원은 당연히 어림없다. 다 먹고살자고 버는 건데 이쯤 어떠나 싶은 마음이 예전보다 덜하다. 매일 반복되는 지출 규모가 어쩐지 유쾌하지 않다. 왕복 통근비에 오르지 않는 월급을 생각하면 도시락을 싸들고 다녀야 수지에 맞지 않나 싶어 시무룩해진다.


기력 소모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점심시간, 직장과 상업시설이 몰린 서울 도심의 네모 문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가. 이렇다 보니 회사와 가까운 식당에 자리를 잡으려면 줄 서기는 필수다. 설령 맛이 없더라도 높은 가격과 북적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줄 서는 집을 피하려 한참 걸을 때도 있다. 먹는 김에 운동까지 한다고 긍정해 볼 법도 한데 자꾸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건 이미 뭘 한들 지쳐버린 사람이 되어서일까. 간단하게 먹자 싶어 구내식당에 가는 날은 희한하게 두 시부터 허기가 진다. 오후 내내 후회하다 앞으론 돈과 체력을 써서라도 나가서 먹으리라 다짐한다. 아, 피곤하다 피곤해.


고물가와 방전의 식사라도 그만한 값어치의 맛과 회복력을 주면 될지어다.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다. 밥 먹는 기쁨을 돌려달라. 그래서 나는 회사에서 자주, 집밥을 생각했다.




집밥 잘 해 먹기는 이번 휴직의 비밀스러운 미션이었다. 가족 앞에서 당차게 말할 자신은 없기에 넌지시 마음만 먹었다. 일 년 동안 내 손으로 남편과 아이에게 건강하고 소박한 식사를 차려줘야지. 외식과 배달 음식은 최대한 줄일 거다. 휴직으로 수입이 반토막이 되었으니 가계에 이런 노력이라도 보태 보자. 아이의 식습관 중 아쉬운 부분을 바로잡고 부엌살림도 맞춰 정리해야지. 신혼 때와 다르게 혼자선 못 챙겨 먹는 식솔이 생겼으니 밥 해 먹을 동기가 뚜렷하다. 육아휴직 때보다는 여유 시간이 훨씬 많다. 아무리 요리가 적성에 안 맞아도 이번에는 해 볼 만하다.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여 보니 예상과 다른 것들이 있다. 우선, 삼시 세끼를 집밥으로 연명하는데도 직장에 다닐 때보다 드물게 장을 본다. 식재료를 잊지 않고 끈기 있게 활용하게 되어 그렇다. 예전엔 집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른 채 불안감만으로 장바구니를 채워 넣기 급급했다. 필요를 구별하지 못해 묻지 마 식으로 결제한 것이다. 돈 낭비도 문제지만 쉽게 섭취기한을 넘기는 먹거리를 앞에 두고 자주 죄스러웠다. 냉장고 속 장유유서를 정확하게 알게 된 이제는 자신 있다. 선입선출 냉장고 파먹기.


  

신선한 채소를 조금씩 사는 기쁨도 생겼다. 마을버스 세 정거장 거리의 전통시장에 간 날 하얀색 양파 몇 알을 샀다. 그동안 아무리 인터넷에서 찾은 보관법을 따라 해도 금세 물러 고민스러웠는데 이건 똑같이 보관해도 무를 기미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서도 처음처럼 탄탄한 육질로 듬직하게 쓰였다. 햇감자 역시 대형마트와 같은 가격에 더 많고 신선하게 담겼다. 왜 이 감자는 꽤 오래 두어도 싹이 안 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집 근처 채소가게에서 담은 애호박 한 개, 버섯 몇 송이도 같은 기쁨을 주었다. 새벽에 집 앞에 편리하게 배송되는 한 상자보다 한 두 알의 싱그러움이 주는 만족감을 나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집밥을 제대로 챙겨 먹고서야 집 밖 미식에 눈을 뜬 것도 별일이다. 있을 때 모르던 가치는 없어 봐야 아는 법. 회사 다닐 때는 곁에 들어찬 맛집에 무감했다. 산해진미로 알려진 곳이라 해도 일과 엮인 장소라 여겨서인지 특별히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시한부 전업주부로 매일의 메뉴를 고민하며 살다 보니 남이 차려준 정찬이 몹시도 고프다. 검증된 조리법과 아름다운 플레이팅이 얼마나 오감을 즐겁게 하는지 너무 잘 알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성실히 밥을 지으며 역설적으로 소문난 맛집에 찾아갈 기회를 손꼽아 기다린다. 함께 먹는 동료를 의식하거나 대기줄에 설 필요 없이 맛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특별하게 음미하며 감사하게 여긴다. 타성에 젖은 매일의 점심이 아니라 반드시 행복해지도록 선택한 어느 날의 이벤트로서 마음에 도장을 찍는다.




현재까지 집밥 미션의 가장 큰 고충은 냉장고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하는 의문에 있다. 요리도 집안일 아니랄까 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허무감을 금세 안겨준다. 앞서 장 보기 간격이 늘었다 쓴 것은 과거의 무계획과 비효율을 비교한 것이지, 현재의 냉장고가 먹을 것을 화수분처럼 내어준다는 뜻은 아니다. 분명 얼마 전 심사숙고하여 장을 봤는데 오늘 냉장고 문을 열면 서늘한 여백에 놀라고 만다. 사 온 재료로 만들었던 요리가 대단했던 것도 아니다. 어제 끓인 콩나물국과 양념된 불고기는 다 먹고 없다. 이래서 우리네 엄마들이 한 솥 가득 요리한 걸까. 결제된 숫자만 봤던 남편 역시 금액과 사뭇 다른 냉장고 속 풍경이 의아한 눈치다.


메뉴 고민은 풀리지 않는 숙제다. 밥 준비를 전혀 해 놓지 않은 날 아이는 여섯 시를 한참 넘기고도 놀이터를 떠날 생각이 없다. 저녁 먹으러 갈 시간이라는 말은 들리지도 않나 보다. 내게도 슬슬 배달음식이 아른거린다. 다른 집들은 도대체 뭘 해 먹길래 손 놓고 서 계실까. 아이 친구 엄마에게 다가가 “지금 집에 가면 저녁은 뭘 해 드시나요?” 묻는다. 힌트를 좀 얻고 싶다.


“에휴, 뭐 맨날 냉동실 고기나 구워주고... 생선 있으면 그거 굽고요.”

 

사는 것 다 똑같다. 평소에도 된장국, 미역국, 카레 따위를 돌리는 수밖에 없단다. 급식 찬스가 사라지는 방학이 벌써 두렵다. 처음 어린이집에 보낼 때 점심 한 끼 먹고 오는 것이 얼마나 동아줄 같았던가. 코로나 재택근무 시절 팀장님들이 집에서 점심 먹기 눈치 보인다고 할 때 그 댁의 상차림을 책임지는 이의 마음이 얼마나 이해 갔던가. 부엌일만큼은 전담한다는 남자 차장님 한 분은 콩나물밥이 간편하고 맛있다며 팀장님, 상무님께 직접 해 보시라 추천해 주셨다. 밥이란 이렇듯 모두가 힘을 합치고 머리를 맞대어야 하는 문제다. 밥, 밥, 밥, 그놈의 밥.


여전히 요리에는 소질이 없다. 디포리와 멸치, 다시마와 건새우를 정량껏 배분한 팩의 존재가 어찌나 고마운지. 나의 모든 국 요리는 육수팩이 책임져 준다. 게다가 근처에 사시는 시어머님은 휴직한 며느리를 위해서도 여전히 자주 반찬을 챙겨주신다. 이것마저 없었으면 어찌 챙겨 먹고살았을지, 도대체 진정한 독립을 언제나 할 수 있을지 까마득하다. 어린 시절 나를 먹여 살린 엄마의 요리도 신비롭다. 영양사님들, 조리사님들, 집안의 끼니를 담당했던 유사 이래 모든 이들을 존경한다.


오늘도 내가 선 부엌에는 기쁨과 감사, 희망과 절망이 함께 한다. 우당탕탕 숨 가쁘다가도 결국엔 따스히 배 불러오는 식탁의 시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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