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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리 Jul 01. 2023

물고기를 키우는 일에 낭만은 없다

적어도 우리 집에 당분간은

과학 수업을 듣고 온 아이 손에 작은 플라스틱 어항이 들렸다. 안에 든 것은 어른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물고기 한 마리. 구라미 종류의 열대어라며 보조 호흡기관이 있어 수면에서 직접 공기를 마신다는 선생님 설명을 또박또박 전해준다. 뚜껑 위에 ‘헤라클레스’라는 글자가 삐뚤빼뚤 적혀 있다. 어떻게 이리 멋진 이름을 생각했냐 칭찬했더니 같은 수업 어떤 형이 지은 이름인데 멋있어 보여 똑같이 썼단다.     


헤라클레스는 수업을 데려가 주신 시부모님 댁에 그대로 놓였다. 맞벌이 부부는 집의 생명체를 제대로 보살필 수 없다는 사정이 암묵적으로 통했다. 하루 세 번 먹이를 챙기는 일, 물고기를 옮겨가며 어항과 자갈을 씻고 물을 갈아주는 일 모두 난데없이 어머님 몫이 되었다.




몇 개월이 지나고 봄기운이 퍼질 때쯤 시부모님께서 여행을 가시기로 했다. 출발 며칠 전, 당분간 먹이를 챙길 수 없으니 헤라클레스를 데려가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참, 올해 나는 집에 있는 휴직자잖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은 분실물을 뒤늦게 찾는 듯한 부끄러움에 냉큼 어항을 옮겨왔다. 이제부터는 저희가 키울 테니 염려 마시란 말씀도 잊지 않았다.


헤라클레스는 꽤 자라 있었다. 반면에 집은 처음 모습과 크기 그대로다. 좁아서인지 물이 금세 탁해졌다. 무심히 회피해 온 물고기의 답답한 하루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자꾸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아 괴로워졌다. 인터넷으로 새 어항과 도구를 검색했지만 초보 눈에는 모두가 어지럽기만 했다. 전전긍긍하는 나를 본 남편은 시간 되는 날 아이와 함께 마트에서 설명을 듣고 사자 했다.


“네가 동물을 싫어해서 키우기 싫어하는 줄 알았어. 근데 이제 보니깐 잘 키우고 싶은데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거네. 시작하면 애정과 에너지를 많이 쓸 것 같아서, 마음이 미리 버거워서. 맞지?“


엇, 이 남자 해석을 잘해 준다. 듣고 보니 맞는 것 같다. 그 사이 나는 불편한 꿈을 꾸다 깨는 새벽을 두어 번 맞았다.


남편의 이른 퇴근 날, 저녁 식사를 바삐 끝내고 집 근처 대형마트로 갔다. 수족관 코너 담당자는 구경하는 어린이 수준에 맞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분으로 동네에서 유명하다. 꼭 그분이 계셔야 한다.      


다행히 우리의 구세주는 근무 중이셨다. 집에 오는 장바구니에는 초심자가 감당할 마음 크기에 그나마 비례하는 스몰 사이즈 어항, 측면 여과기, 박테리아가 한 통에 든 ‘스타터 세트’가 담겼다. 이끼가 잘 안 낀다는 자갈, 생물 수초 화분 두 개, 물고기를 옮기는 망도 같이 왔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가족도 함께라는 사실이다. 금색, 은색 구라미 두 마리와 ‘청소 물고기’로 알려져 있다는 알지이터 두 마리.



환영해. 너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헤라클레스야, 이제 넓은 곳에서 새 삶을 살 거야. 더는 외롭지 않을 거야. 6개월 간 고생했어.


수조는 거실 책장 가장 아랫 칸을 비운 곳에 놓였다. 물생활 초보 세 명은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한참을 있었다. 연둣빛 수초가 하늘거리고 공기 방울이 뽀글거리는 수조에서 다섯 친구들이 유유히 움직였다. 숨 쉬러 잽싸게 수면을 탁 쳤다 내려가거나 여과기의 약한 물살을 즐기는 모습에 빠져든다. 아, 이것이 힐링이고 사랑이구나. 너희가 행복하니 우리도 행복하다. 이제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캠핑에 불멍이 있고 해변에 바다멍이 있다면, 우리 집엔 물멍이 있다.




영화 <기생충>을 보았는가. 어떤 시점 이후로 전혀 다른 분위기가 펼쳐지는 영화 말이다. 급격한 장르 변화, 우리 집 작은 수조 이야기가 바로 그랬다.


물멍의 평화는 하루를 채 넘기지 못했다. 금색 구라미인 금동이가 헤라클레스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알지이터 한 마리마저 다른 한 마리를 거칠게 쫓는다. 저러다 말겠지 했는데 점점 심해진다. <더 글로리> 드라마를 우리 집 거실에서 관람할 줄이야. 친구를 만들어주려던 선의가 무안하다 못해 참담하다. 다시 검색창을 찾는다. 구라미는 성격이 까칠한 편이란다. 알지이터는 난폭한 편이고 영역을 지키려는 성향이 있어 타 어종 합사에 주의해야 한단다.


구세주 선생님, 그런 말씀은 없으셨잖아요. 이끼를 잘 갉아먹어서 초심자가 어항 관리 겸 기르기 좋다는 얘기만 하셨잖아요. 공격하는 물고기는 같은 어종인데 이 무슨 날벼락입니까. 저희는 어항을 늘릴 처지가 아니라고요.     


거친 물고기 둘을 옛 수조에 임시로 옮겼다. 생각하는 의자 마냥 훈육이 조금은 통했기를 고대하며 합사했지만 말짱 도루묵. 헤라클레스 이름을 지은 자에게 몇 마리만 다른 집에 보내주자고 말해봤지만 완고한 거절만 돌아왔다.


어느 날 아침, 거실에 나간 남편이 외마디 탄식을 내뱉었다. 헤라클레스에게 잘해 줘 보겠다고 시작한 일이 그를 용궁으로 데려가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알지이터 한 마리도 함께 떠났다. 좁은 곳에서 오래 꿋꿋하다 너른 곳에서 허무해져 버린 헤라클레스에게 미안했다. 물을 교체하고 여과기와 자갈을 청소하면서, 제대로 환경 관리를 익히지 못한 주인 때문에 물고기들을 힘들게 한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새 식구 세 마리가 남았다. 금빛 구라미 금동이, 은빛 구라미 은동이, 알지이터 요동이. 셋이서는 잘 살길 바란 소망은 싸움 상대만 달라진 걸 목격하며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번엔 금동이가 은동이를 쪼아댄다. 너희 정말 왜 그러니.


분리 밖에는 답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첫날처럼 저녁 식사를 급히 끝내고 마트로 향했다. 일전에 마트에 들렀을 때 미리 구세주께 상황을 설명하고 논의했었다. 다시 가져오면 순한 물고기로 바꿔주겠다 하셨기에 금동이를 데려간 것이다. 작별 인사를 나누고 새동이를 데려왔다. 세상에, 이번에는 새동이가 은동이를 공격한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떠올렸다. 소유는 근심이다. 우리는 근심이 모여있는 곳을 바라보는 것조차 힘겨웠다. 제안을 수십 번 거절하던 아이도 비로소 마음을 고쳤다. 모르는 집이 아닌 마트로 보내주면 오가다 인사라도 할 수 있을 거란다. 다시 만난 구세주께 “바꿔주지 않으셔도 된다. 새동이가 행복하게 잘 지내었으면 좋겠다.” 라며 무책임한 이별 대사의 전형을 읊었다. 막힌 속이 풀리는 것만 같다. 지난번 데려다준 금동이도, 다시 물적응을 하는 새동이도 우리 집에서보다는 행복해 보인다.


장르가 바뀐 영화에서 남은 은동이와 요동이는 과연 어떻게 될까. 종류와 크기가 다른 물고기는 서로의 영역과 관심을 지키며 잘 살면 되지 않을까. 그래 줬으면 참 좋았으련만. 우리는 며칠 뒤 네 번째로 구세주를 만났다. 다시 한번 축복을 전했다. 요동이도 잘 살아라.




헤라클레스를 위하다 시작된 대격동은 최후에 은동이 한 마리만을 남겼다. 불편한 다툼을 지켜보는 상황은 면했지만, 찰나의 꿈같았던 물멍과 힐링 시간은 이제 여기에 없다.


입학 초 방과 후 수업을 선택할 때쯤, 선배 부모에게서 '생명과학'이라는 과목을 조심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 말이 귀에 콕 박혀준 덕에 여차하면 장수풍뎅이와 달팽이까지 맞았을 미래를 피해 갔다. 나는 소중한 생명을 키워낼 그릇이 못 된다. 소유하지 않고 공생하자. 생명을 들인다는 것, 신중하고 또 신중하자.


나는 요즘 의무감을 진 채 먹이를 주고 어항을 청소한다. 아이에게도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주기 위해 칭찬 스티커용 일일 루틴 중 하나로 ‘은동이 밥 주기’를 포함시켰다. 입양 보내기에 결사 반대해 놓곤 보살핌에 천연덕스러운 어린이, 하루 대부분 회사에 나가있는 어른 한 명을 대신하여, 이 한 마리 물고기를 제대로 키울 자는 현재 집에 있는 나, 바로 나뿐이다.


은동이가 부디 잘 지내주었으면 한다. 찰떡같은 센스는 없지만 검색하고 배워서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돌봐줄 것이다. 바꾼 여과기가 너를 더 숨쉬기 좋게 하기를, 지금의 먹이 주기와 양이 너의 건강에 맞는 것이기를, 오래오래 편안히 지내주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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