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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리 Sep 23. 2023

집에는 계절이 정직하게 닿는다

해와 바람을 쐬는 생활자의 묘미


「엄청 덥네. 오늘 32도래. 가을이 온 줄 알았더니.」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경사로를 막 오른 뒤라 이마엔 땀이 송송 맺혔다. 가쁜 숨을 고르며 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른 뒤 답장이 왔음을 알리는 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아하. 오늘 덥구나. 점심 먹으러 나가긴 했는데 실내에 있어서 잘 몰랐네.」


‘아하, 오늘 덥구나.’라니, 웬 남의 나라 불구경. 지금 나랑 같은 한국, 같은 서울에 있는 게 맞나. 그러고 보면 억수가 퍼부었던 날에 퇴근한 남편은 "비가 그렇게 많이 왔었나." 라 했다.




왜 그런지는 안다. 사무직의 일터란 모름지기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더위와 추위, 눈과 비, 바람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일만 할 수 있게 하는 안전한 실내가 아니던가. 규정이 바뀌어 손 시린 겨울이 있기도 하고 외근이 잦은 직원에게는 다르기도 하겠지만 대체로 그곳은 한결같이 쾌적하다. 한여름에 적당히 서늘하고 한겨울에도 온풍이 스민다. 오뉴월에 사무실 자리가 춥다며 두툼한 후드점퍼를 챙겨가던 남편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퇴근 시간 우산이 없는 자가 아닌 이상 낮 시간 비 정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나는 그것을 회사 생활의 기쁨이라 느끼기도 했다. 지각을 면하려면 9호선 급행열차를 타야만 했던 날, 타자마자 떠밀려 도느라 가방 끈이 몸을 칭칭 휘감아도 삼십여 분간은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출근길 지옥. 개미떼처럼 에스컬레이터와 환승 줄을 분주히 이동하고 회사 엘리베이터 전쟁까지 마쳐 비로소 제 층에 도착할 때. 그 순간 훅 에워싸는 다른 공기는 분명 어떤 종류의 행복이었다. 장마철 눅진함, 찌는 더위, 겨울 외투 탓에 서로 몸을 웅그리느라 난 땀. 억척스러운 출근 서바이벌 속 모든 불쾌함을 순식간에 평온한 쾌적함으로 바꾸어주는 에어컨의 고마움. 온습도뿐 아니라 내가 오기 전부터 다른 손길이 닿아 이미 깨끗해져 있는, 집과 다른 공간이 주는 쾌적함도 한몫할 것이다. 혹 시간 여유가 있어 일층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들고 오는 호사마저 부릴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또각또각 일터로 입장한다. 이 시간 이후 사무실 생활자에게 바깥 날씨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점심시간 잠깐 느끼는 더위와 추위도 인상적인 것이 아니다.


휴직을 하고 집의 생활자가 된 이후는 다르다. 날씨가 온종일 정직하게 내 삶에 다가오기 때문이다. 더운 날은 덥고 추운 날은 그대로 춥다. 내가 느끼는 온도대로 선풍기나 에어컨, 보일러를 켜야 한다. 촘촘한 지하철 역 덕에 거의 실내로만 이동할 수 있는 출퇴근 생활자와 다르게, 지금의 나는 집 밖 일정을 조금이라도 수행하려거든 말 그대로의 실외를 한참이나 누벼야 한다. 휴게실 통창 너머 나무 색 변화에 잠깐 던지던 시선과 다르게, 그 변화를 일상에서 곧장 맞닥뜨린 후 적응한다. 볕이 뜨거우면 반드시 챙이 있는 모자를 챙겨 아이를 데리러 간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바깥 소리에 귀 기울여 정도를 가늠한다. 아침 저녁만이 아닌 한낮 높은 해를 있는 그대로 맞는다.




그래서 불편하다. 누구 하나 전기세와 가스비를 대신 내 주지도, 최적 컨디션을 위한 온습도를 맞춰놔주지도 않는다. 바깥 소리와 변덕스런 날씨가 집중을 흩트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편안함과 쾌적함을 반납한 대신, 내 생활에는 더 많은 빛과 색과 바람이 생겼다.


실내형 인간에서 하이브리드형 인간으로의 전환. 봄이 오고 가을이 오는 것을 다르게 느낀다. 지난 겨울과 여름도 새로웠다. 고작 출퇴근이 없어졌단 이유만으로 도시 쥐가 시골 쥐 되어 자연과 친구인 양 말하는 게 우습지만, 사실인 것을 어쩌랴. 모든 것이 갖춰져 있던 사무실에서는 무신경했던 평일 낮 시간 바깥공기를 한번 더 느끼는 것. 못 열던 창문을 열어젖히는 것. 너머 한 번 더 내다보는 것. 하늘 한 번 더 올려다보는 것. 내게 맞는 온도를 한번 더 생각하는 것. 이토록 솔직한 날씨와 거기에 대응하는 동동거림이 나의 집 생활을 조금 더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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