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기 어려웠던 자의 강제 수행기 (1)
힘든 일은 꼭 한꺼번에 일어난다. 막 일어난 아이 눈에 평소와 다른 눈곱이 낀 날, 하필 그날 아침부터 냉장고가 이상했다. 계기판에 '88'이라는 숫자가 찍혔고, 모터 소리 같은 것이 유난히 크게 들리더니 불규칙적으로 멈추었다. 나는 속까지 불편하다며 굳어있는 아이 표정 한 번, 부엌 한 번 살피기를 반복했다.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가 하루아침에 두 가지나 생겼다. '지금은 아니야, 제발.' 읊조리며 냉동실 문을 열고 손을 넣었다. 성에 낀 모양새나 덜 차가운 느낌이 수상했지만 음식이 녹을 정도는 아니길래 심각한 고장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짓궂은 가전의 몇 분짜리 장난이거나 일탈이기를 바랐다.
다음 날부터 아이는 내리 아팠다. 하루는 구토 후 열이 있고 다음 날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오고, 그 후론 기침이 멎지 않는 식이었다. 더불어 우리의 냉장고마저 완전한 아픔을 드러냈다. 잔인하게도, 한여름이었다.
방문 수리 기사님께서는 이런저런 부품을 갈아볼 수는 있으나 정확한 원인을 알기 어렵다셨다. 교체된 부품을 품은 기계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불규칙한 웅웅 소리를 다시 냈다. 냉장고가 신혼집에 처음 들어오던 날 팔을 쭉 펴 감싸안고 사진을 찍었던 게 기억났다. 찾아보니 웃음이 났다. 더 서글퍼졌다. 벌써 망가지다니, 하물며 고쳐지질 않는다니. 내 어떤 종류의 설렘과 시작이 벌써 너무 먼 곳으로 가버린 것 같았다. 냉장고 뒤쪽 먼지를 정성스레 청소하시고 해결하지 못함을 미안해하시던 기사님의 친절함이 대비되어 더 그랬다.
다음 주말, 남편과 지체 없이 가전제품 매장을 방문했다. 여러 제품을 구매하는 예비부부나 이사예정 고객이 아닌, 가능한 한 빠른 날짜만을 찾는 이에게 오는 할인 혜택은 크지 않다. 올해는 정말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데 또 예상치 못한 목돈이 들어가니 낭패다. 하지만 어쩌겠나. 공기청정기도 가습기도 아닌 냉장고인 것을.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다. 냉장고란 실로 엄청난 가전이다. 잠시도 멈출 수 없는 살림의 대들보다. 우리는 며칠간 외식과 배달, 실온 음식에 완전히 지쳐버렸다. 아이는 컹컹 기침을 하며 조부모님들께 이를 재미난 뉴스인 양 알렸다.
오래전 소분해 둔 버터, 마늘, 들인 시간을 잊은 바람에 손댈 수 없었던 생선, 고기, 떡……. 실온에 녹아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음이 명백해진 후에야, 언젠가는 요리에 사용될지 모른단 미련과 작별했다. 미간의 찌푸림이 인사를 대신했다. 과정이 불편했지만 속은 후련했다. 만약 냉장고가 고장 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전부 확인하고 버릴 수 있었을까. 절대 못했을 것이다. 언제 한 번 제대로 정리하리라며 움켜쥔 주먹 모양 그대로 그 자리에만 있을 것임을 안다는 듯이, 제 스스로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듯이, 고장난 냉장고가 도리어 내 등을 떠밀어주었다.
묵힌 짐을 버리고 새로이 정리하는 일. 올해 거뜬히 하겠다 생각하고도 이렇다 할 진척이 없는 일이었다. 무겁던 내 몸을 일으킨 것은 역시 자발적 동기보다는 타의에 의해서다.
집 정리라니 말은 얼마나 쉬워 보이는가. 하지만 결혼 후 2년마다 전셋집을 옮겨 다니면서 켜켜이 쌓인 짐들은 잊힌 자리에서 시간여행자처럼 덩그러니 발견되곤 했다. 이사 전 미리 정리되지 못한 채 딸려온 짐들은 이사업체 직원들의 숙련되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나도 잘 모르는 붙박이장 한 구석에 들어 있었다. 영아기 옷가지와 물품들은 아이가 초등학생이 된 지금도 어디에선가 자꾸만 튀어나오니 정말 미스터리다. 게다가 나름 예술혼을 펼쳤다며 가져오는 어린이 창작품은 얼마나 많은가. 잊을 만할 때 슬쩍 버려도 뒤돌면 다시 또 저만치 쌓여있다. 맞벌이를 핑계로 참 많은 짐들이 묵혔다. 중고판매, 나눔, 물품기부도 많이 해 왔지만 아직 비우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다. 새 상품을 꾸준히 사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집은 꽉꽉 차는 걸까.
이러니 제대로 된 정리는 단칼에 하기 어렵다. 앞의 것을 빼야 뒤의 것을 뺄 수 있다. 빈자리가 생겨나야 그 자리에 다시 물건을 꺼내놓고 분류하여 알맞게 처분할 수 있다. 순서가 있고 시간이 걸리니, 거창하게 말하자면 지구력과 인내력이 절실하다.
이런 나에게, 채찍질 같은 사건이 하나 더 생겼다.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