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쓰며 혼자 쓸 수 있게 되다
휴직 지원서에도 글을 쓰겠단 말을 적기는 했다. 거창한 계획을 앞단에 흩뿌린 후 마지막 모퉁이에 쓴 한 구절만큼의 진심.
출근을 대신해 꿈꾼 일들이 어디 한두 개인가. 계획란을 채운 다른 포부들도 회사원의 언어로 꾸며 썼을 뿐 거짓은 아니었다. 그중 하필 글쓰기를 먼저 한 건 순전히 시기가 잘 맞은 모임 때문이었다. 어쩌다 찾은 글쓰기 모임이 마침 닿을 수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 시작한단다. 더구나 대상을 엄마들로 한정한다니 마치 나와 동료들을 부르는 듯한 착각에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참가를 신청하는 그 순간도 거꾸로 선 모래시계 속에는 1년이 알알이 내리고 있었다. 끝에 못한 것들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저절로 움직이는 시스템에 올라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 모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첫발이리라.
첫날의 설렌 공기를 기억한다. 문장을 만들려는 동기는 모두가 다르면서 닮아 있었다. 아이를 키우며 제 삶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우연히 책에서 위안과 답을 얻었다고. 그러자 읽기를 넘어 무엇이든 쓰고 싶어 졌다는 한 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나는 말수 적은 겉과 다르게 속으로 흥분했다. 비슷한 이들과 관심을 나누는 희열, 시동을 걸었다는 쾌감을 동력 삼아 당장이라도 책 한 권은 뚝딱 써낼 것 같았다. 마음속 이야기보따리에 아이를 꼭꼭 품고 있었으면서도 '육아 소재는 진부해서 피하고 싶다.'는 헛소리를 자신 있게 했다. 그나마도 '위트 있게 쓰고 싶다.'는 말만큼은 입 밖에 내지 않아 다행이었다. 모임을 이끌던 분께서 "가끔 재밌게 쓰는 걸 목표 삼는 분들이 계신데 그건 사실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좀 더 부담 없는 목표를 세워 봅시다." 라며 먼저 경고해 주신 덕이다.
8주간의 모임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참석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초심과 달리 한 편도 쓰지 못하겠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엄마로 살기 전에 '글로 먹고사는' 직업이었던 분들마저 힘들어하셨다. 나도 알고 있다. 글이란 쓴 사람의 결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 빈틈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 쓰다가도 잇따라 길을 잃는 것. 속성이 이럴진대 하물며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내는 에세이 장르에다가 ‘공개하는 글쓰기’라니, 자꾸만 비공개 전환 버튼에 손이 가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을 테다.
웬일로 나는 결석 없이 몇 편의 글들을 써 냈다. 결국 또 휴직 카운트다운 덕분이다. 지금 안 쓰면 못 쓸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이렇게나 무섭다. 스스로 내건 미션을 수행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썼다. '날아다니듯 잘 쓰는 사람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데 내 글은 대체 무슨 필요와 쓰임으로 존재하나' 싶을 때마다 에휴, 하는 한숨 한 겹에 생각을 포개 두었다.
이는 모임에서 배운 것이기도 하다. 첫 자를 올리기 전 하얀 바탕의 두려움은 대문호부터 유치원생까지 매한가지라 했다. 잘 쓰려고 하지 말고 그냥 쓰기만 하자는 당부를 여러 번 나눴다. '모든 초고는 쓰레기' 라는 헤밍웨이의 말까지 떠올리니, 나 또한 삼천포에 열댓번은 빠지는 비문의 끄적임이 아무렇지 않아졌다. 쓰레기였던 초고는 고작 흰 바탕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다음 날 나를 아예 다른 글로 데려간다. 일단 끄적이면 쓰게 되고, 쓰게 되면 모이며, 뭉치가 되면 힘을 가진다 했다. 목차를 먼저 구성하면 수월하다거나 하루 중 집안일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두세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과 같은 조언은 얼마나 실용적이었는지 모른다.
봄이 지난 후에는 온라인 글쓰기 마감 모임을 찾았다. 그 덕에 이제는 '일단 쓰기'를 넘어 '꾸준히 쓰기'의 힘을 얻었다. 그 힘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복직 후에도 이 루틴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노력해 보려 한다. 꼭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올해 브런치를 다시 시작했고 한 권의 브런치북도 발간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딱 원했던 만큼의 묵힌 독을 빼낸 것 같아 개운하고 만족스럽다. 얼마 전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브런치북 발간 소식을 전했다. 출판되면 알려달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만 해도 당연히 격려의 농담인 줄 알았는데 몇 주 뒤 조심스레 '혹시 책이 언제 나오냐'고 물어온 친구. 그 말이 귀엽고 고마워 웃음이 터졌다. 실제 출판이 아니라 온라인 플랫폼 상의 묶음 책이라는 설명을 너무 생략했었나 보다. 이제는 '쓰고 있다'만이 아니라 ’이만큼 모았다'라는 발전된 근황을 나눌 수 있음에 즐겁고 감사하다.
글을 써서 가장 좋은 점은 '내가 쓰고 있다는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정말 그렇다. 나도 글 쓰는 내가 좋아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