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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리 Dec 06. 2023

직장인에게 도서관을 허하라

달달 쫀득한 대출 반납의 맛


돈벌이에 바빠 그렇다면 핑계가 될까. 졸업 후론 도서관에 대한 기억이 몇 없다.


신혼집 바로 앞에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6시 퇴근도 어려운 직장인에게 6시에 불 꺼지는 시설이란 그림의 떡. 이용하려면 마음먹고 토요일에 가야 했다. 구조상 야외에 무인반납함을 놓을 수 없다 하니 반납 또한 2주 뒤 6시간의 기회뿐. 굼뜨게 주말을 누리다간 금세 연체 문자를 받는다. 높은 대출 산을 한참 올려만 보다 서서히 발길이 멎었다.


우리 회사, 사내 도서관도 있는 회사였다. 이노베이션, 싸워라 이겨라 류 헛헛한 비즈니스 용어에 굳어있다가 종종 들어선 서가에서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따위 글자가 보이면 스르르 녹았다. 엑셀과 아웃룩, 파워포인트 화면을 떠나 반듯한 책등에 두는 시선만으로 쉼이 되는 시간. 모르는 이름들 속으로 편하게 갈 수 있는 곳. 정작 방문 횟수는 손에 꼽고 다 못 읽은 책을 반납하곤 했지만, 일하다 '아, 7층에 도서관이 있지.' 생각하면 괜한 안도와 그리움이 밀려왔다. 얼마 후 서가 자리는 커피머신과 색색의 소파들로 채워졌다. 고객 접대공간이자 직원 휴식공간이라 했다. 누구도 크게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회사에서는 책보다 커피가 더 필요하다 믿었으니까.


우연히 회사 가까이에 작은 도서관이 있는 것을 알았다. 이름에 '도서관' 자가 없는 데다 그 건물 직원 전용 공간으로 착각한 탓에 오래 몰랐다. 점심시간에 가서 회원증을 만들었다. 며칠 후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도서관입니다. 신청하신 상호대차가 어려울 것 같아서요. 건물이 곧 공사를 시작해서 휴관 예정이에요."

"그럼 재개관은 언제인가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2년 이상은 걸릴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9 to 6 직장인은 도서관을 즐길 수 없는 운명인가. 사서 보면 된다고? 아니다. 꼭 도서관에서 봐야 할 책들이 있다. 오직 그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단 말이다.




출근을 멈추고 시간이란 보물을 손에 쥔 후 마주한 기쁨. 그중 도서관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동네마다 소담하게 자리한 '작은 도서관'은 단연 올해의 발견이라 할 만하다. 주민 봉사 격으로 운영되어 운영 시간이 아주 짧은 곳도 많은데 올 한 해만큼은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형 도서관에서는 예약 정원까지 다 찬 인기도서가 작은 도서관에는 있다. 심지어 손을 덜 타 깨끗하다. 남편과 아이에게 "그 책 읽고 싶다고? 내일 빌려줄게." 호언장담하고 다음 날 턱 내보인다.


하굣길 심심한 공백이 생길 때면 작은 도서관에 들른다. 몇 년을 살면서 우리 동 주민센터 옥상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4층 계단을 씩씩하게 오르는 아이를 뒤따른다. 숨을 헐떡이며 문을 밀고 들어서면 익숙한 책 내음이 먼저 인사한다. 20평 남짓한 공간, 한눈에 담기는 서가와 책상.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와중에 꼭 한 명은 아는 얼굴을 만난다. 약속이나 한 듯 또 다른 아이가 할머니 손을 잡고 들어온다. 우연히 만나진 아이들은 각자에게 웃겼던 책 페이지를 서로 앞에 들이밀며 같이 웃자고 야단이다.



계획 없는 주말, 다른 동네 도서관을 여행 삼아 찾아가기도 한다. 구석구석 이렇게 많이 있는 줄 몰랐다. 서울의 25개 구, 각 구마다 15개 이상씩 산하 도서관이 있다. 여기에 시청도서관, 국립도서관, 교육청 산하 도서관, 전문 도서관, 주민 개방 학교 도서관까지 더하면 대강만 계산해도 엄청나다. 사는 지역 도보권 내에 작더라도 괜찮은 도서관이 반드시 하나는 있다는 의미다. 지역구에 따라 상호대차나 타관반납 서비스가 있어 근처에 없는 책을 편히 빌려볼 수 있다. 신간은 희망도서 신청 후 1순위로 볼 수 있고, 매달 문화체험 프로그램이 얼마나 다채롭고 유익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낸 세금이 이렇게 쓰인다면 두 팔 벌려 환영이다. (서울시 전체 도서관 찾기)


지도와 지리에 열성인 어린이 손에 이끌려 다른 지방에도 발자국을 많이 찍었다. 책에 대한 애정보다 (물론 좋아하긴 하지만) 전국 도서관 스탬프 투어에 가까운 목적. 부산 여행에서는 해운대 도서관을, 순천 여행에서는 기적의 도서관을 찾아갔다. 동선에 안 맞는 일정이 마뜩잖았던 부모도 막상 가지각색의 책 세계에 들어서면 속절없이 편안해졌다. 미끄럼틀과 다락방까지 있는 어린이 도서관은 눈이 더 즐겁다.


도서관은 다른 체험활동들처럼 한 달 전부터 시간 맞춰 예약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에게든 언제든 오너라 하고 기다려주는 마을 어귀 느티나무. 헤매는 우리 뒤를 묵묵히 지키다 반겨주는 한결같은 공간. 그런 곳을 제대로 알았다. 기쁘게 누렸다.




그 밖에 도서관을 가까이하며 달라진 것은, 그때그때 관심 가는 책을 맘껏 찾아보게 되었다는 거다. 친구와 얘기하다 천문학이 궁금해지면 바로 검색한다. 그림책 만들 방법을 알고 싶어 도서관에 간다. 영상으로 본 달변가의 저서를 찾는다. 도서관 검색 창은 안전하다. 녹색 창이나 빨간 창처럼 광고와 쇼츠 영상에 길 잃을 염려가 없다. 원하는 답이 손에 든 한 권에 다 들어있다 생각하면 안심되고 재미도 있다.


현재의 관심을 집약해 따끈하게 고른 책이다 보니 자주 편하게 손에 잡힌다. 기한이 정해진 긴장감 때문일까. 집에 있던 다른 책보다 반납일이 있는 도서관 책에 더 정복욕이 생긴다. 대출과 반납의 맛이 있다.


도서관을 믿고 따른 덕에 오래 묵힌 책들을 비우는 데도 미련이 줄었다. 읽고 싶은 책의 소장 가치가 아리송할 때도 우선 빌려본 뒤 구매해도 늦지 않다 여긴다. 도서관은 휴직기간 집 정리의 새로운 공신이다.


읽는 습관도 생겼다. 그동안은 책을 사 모셔만 두는 가짜 독서인으로서 헛배를 불렸다. 도서관 책으로 다시 시작하니 표지만 백 번 읽은 집 책들에도 천천히 손이 간다. 시간과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한 문장 한 글자 꼼꼼히 들어온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썼나 싶어 상상 속 작가에게 여러 번 다녀온다. '너무 좋았어' 하는 속 빈 감상 대신 줄줄이 진심을 이야기할 여력이 솟는다.


쓰고 싶다는 사람이 읽지 않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던 연초 글쓰기 모임 선생님 말씀처럼, 읽으니 더 많이 쓰고 싶어졌다. 내 글의 부족함이 잘 보여 부끄러운데도 그렇다.





직장인 도서관 접근 불가론은 성급한 체념이었다. 도서관은 생각보다 우리 곁에 바짝 붙어 있기 때문이다. 야간 무인 대출과 반납이 가능한 곳들이 있고, 제법 많은 지하철 역에 스마트도서관이 있다.


다시 출근하면 지금처럼 작은 도서관을 편히 가진 못할 것이다. 대신에 그때는 주말 시간과 회사 근처 도서관에 눈독들여야 겠다. 복직할 사옥 근처 도서관을 찾아보니 10분은 걸어야 하는 거리. 여기라도 있는 게 어딘가. 점심시간 산책을 하자.


직장인에게 도서관을 허하라. 도서관은 고상한 허세가 아니라 소박한 유희이자 안식이니까. 우연히 만난 아는 얼굴에게 재미있는 책 페이지를 들이밀며 인사 건넬 수 있도록. 반듯한 책등에 두는 시선만으로 쉼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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