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지는 것에 대한 기쁨과 슬픔
놀이터에서 아이가 작년보다 밝아 보인다는 말을 들은 게 벌써 세 번째다. 초등학생이 되며 강화된 까불거림이기도 하겠지만, 올해는 낮 시간에 늘 지척인 내가 아이에게 나름 뒷배나 비빌 언덕쯤 되었나 보다. 외로운 외동으로서 수줍음을 이겨낼 '용기 충전소', 놀만할 친구가 없어 무안하다가도 뒤돌면 기다리고 있는 '가장 잘 아는 얼굴'.
아이 눈에는 내가 다른 어머니들과 어울려 대화하는 모습도 보기 좋은가 보다. 낯선 무리와 떨어져 서 있기라도 하면 달려와 "엄마도 빨리 저기 가서 같이 얘기해~" 하며 팔을 잡아끄는 통에 얼굴이 붉어진다. 제발 쉿, 엄마가 알아서 할게.
나로 인해 가족이 반짝인다. 리프레쉬 명목의 휴직을 썼고 실제 그런 날을 보내고 있지만, 실상 우리 가족에게는 제2 육아휴직으로서의 역할이 크다. 돌봄과 관련된 수백 가지 문제가 오직 나 하나라는 사람으로 해소되니 그 부분만큼은 걱정 없이 지내는 1년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둘러싼 모든 것이 안정되자 근처에 사시는 시부모님, 필요할 때 지방에서 오시던 친정부모님도 훨씬 더 자신들만의 시간을 갖게 되셨다. 특히 남편은 회사에서 아이가 아프다거나 늦는 아내를 대신해야 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고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다. 퇴근할 때 저녁 육아의 몫을 생각하며 마음 앞세워 달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안심인지 나는 안다.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나 하나 집에 있으면 해결되는 일이 이렇게 많구나.’를 온몸으로 느낀다는 것이. 커리어에 대한 성장욕이 무디어진 건 사실이지만 모두 내려놓고 전업주부로 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방법이 달라질 수 있을지언정 나는 내 일을 통해 경제력과 전문성을 갖고 싶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고자 하는 바람이 부모의 각자도생과 각개전투를 전제로 한다면 그 누가 아이를 낳을 것인가. 양육자 한쪽이 전업이 아니더라도 지금보다 매끄러워야 하지 않을까.
보육 지원금 확대, 돌봄 교실 시간 연장 같은 정책은 필요하지만 본질이 아니다. 내 아이를 다른 곳에 오래 맡길 수 있는 환경을 늘리는 것보다, 주 양육자가 가정 내에서 시간을 가지면서도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 마련이 우선이다. 거기에 올라타는 것이 보편적이어야 한다. 누구나 지장없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업무시간 조절이 동료의 손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개인의 이기나 유난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부작용도 시행착오도 있을 어려운 이상이지만 방향만큼은 꼭 이랬으면 한다.
순전히 운과 때가 맞아 초등학교 1학년 시기에 휴직을 썼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이런 걸 '쓸 수라도' 있어 '돌려 막기'가 가능했다. 개별적인 행운과 타이밍, 우연히 통하는 직업 특성, 각자 찾아내야 하는 외주 동아줄에 기대야만 어떤 시기를 순탄하게 보낼 수 있다면 육아는 베팅과 다를 바 없다. 감사한 휴직이지만 다른 부모의 입장에서도 이게 최선인가를 묻는다면 아니라 말할 수 있다. 영속적인 도움이 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 역시 아이가 2학년이 될 때면 다시 숨차오르는 매일을 시작할 것이다.
멈추니 가족이 반짝인다. 덕분에 내 안의 무엇인가도 채워진다. 우리 집 1학년은 몇 달만 지나도 용기 충전소를 찾지 않을 것이다. 돌아볼 필요 없이 제 스스로 강해지겠지. 그렇게 되기까지 나와 아이는 충분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우리에겐 분명 이 시간이 필요했다.
휴직만이 방법은 아니다. 완전히 멈추지 않고도 원할 때면 누구나 언제든 가족 곁으로 갈 수 있어야 한다. 각자 살아내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를 돕는 방식으로, 집집마다 반짝였으면 좋겠다. 그 빛은 우리 안팎의 곳곳을 채워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