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같이 떠나 보았다
여행을 가야겠네.
휴직을 시작한 후 가장 많이 들은 말. 맞는 말이다. 남은 연차와 업무 상황, 상사 눈치 볼 것 없이 비수기를 골라 떠날 수 있다는 건 직장인으로서 이직과 퇴사가 아닌 이상 좀처럼 잡기 어려운 기회니까. 게다가 '리프레시(refresh)' 휴직이지 않은가. 내 안의 뭔가를 그만두어야만 다시 시작되는 것. 새로운 공간에서 습관과 흥미를 바꿔보는 것. 여행만큼 리프레시와 어울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회사 공지부터 선정, 시행까지의 간격이 짧았다. 만약 내 힘만으로 결정할 수 있었거나 시작일에 여유가 있었다면 여행만큼은 계획적으로 준비했을지 모른다. 초등학교 방학 맞이 외국 여행, 적어도 제주도나 시골 한달살이 정보 정도는 기웃댔을 것이다.
그러나 호명 후 얼떨결에 올라탄 보드에서 나는 어어, 하며 엎어져 있다 천천히 중심을 잡았다. 그 사이 물결은 무심히 흘러 나를 12월에 데려다 놓았다. 바다는 고요하지 않았다. 길고 긴 방학 풍랑을 두 번 넘겼고 입학과 적응 너울에 흔들렸으며 나 자신을 위해서도 뭐든 해 보겠다며 움직였다. 밥 해 먹고 치우는 것과 같이 사소한 앞가림도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했다. 시간은 무빙워크에 탄 마냥 태연하게 다음 달력에서 나를 불렀다. 코 앞의 주말을 해결하느라 몇 달 후의 몇 박을 생각할 부지런이 없었으며, 큰 지출을 감수하고 직전에 나설 여유는 더 없었다. '왜 더 멀리 더 오래 떠나지 않았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밖에 답할 도리가 없다.
참, 여권에 올해자 도장을 찍기는 했다. 사무실 인간이란 원체 치밀하게 휴가를 꿈꾸는 자. 가까운 미래의 휴직을 꿈에도 몰랐던 작년 11월, 또래를 키우는 친구 제안으로 두 쌍의 모자(母子) 여행을 준비했었다. 갑자기 휴직자 신분이 된 탓에 연차를 아끼려던 노력이 무상해진 4박 5일의 오사카. 일곱여덟 살 아이 둘을 달고 다니는 여행이 휴양이 아님은 당연하고 길게 즐기지도 못했지만, 덕분에 얼추 '리프레시하는가' 싶게 1월을 시작했다.
근사한 외국 여행이나 한달살이 대신, 나와 가족은 멀지 않아도 오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갔다. 당도한 계절의 휴일을 채우고 소박한 주머니를 열며 아무렇게나 서울을 떠났다. 올해만큼 서로 손을 잡고 전국 각지를 다닌 적이 없다.
외출에 품이 많이 드는 영아가 아닌 이상, 어린이가 있는 가정의 주말은 대체로 바깥을 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여행이 유별날 것은 없다. 매주 캠핑을 떠날 만큼 활동적이고 부지런한 이들에도 비할 바 못된다. 다만 우리만의 색깔은 있다. 가능한 범위에서 아이의 차 멀미와 취향을 고려한 대중교통 중심 국토 순회 여행.
연초부터 부산과 대구 지하철에 쉼 없이 올라탔다. 부산 해동용궁사, 예산 수덕사에서 소원을 담아 초를 밝혔다. 봄에는 시댁 가족과 함께 원주의 초록을 즐겼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간 여수. KTX로 남쪽 땅 끝 바다에 닿는 경험은 부산과는 또 다른 맛. 장마 탓에 한 번도 갠 적 없는 하늘이었지만 15년 전 부모님과 걸었던 오동도를 남편 아이와 함께 걷는 기분은 퍽 감격스러웠다. 순천만과 국가정원은 호우 경보를 비껴 해맑게 우릴 맞았고 만 보 이상의 걸음과 더위를 이길만한 풍광을 선물했다. 여름 끝엔 평창의 물에 뛰어들었고, 가을 시작엔 태안이 보여준 서해바다 낙조로 한참이나 말을 잊었다.
지난달에는 강릉 당일치기 여행을 했다. 동해 바다열차가 올해 12월에 운행을 중단한다는 소식 때문이다. 먼저 나서지 않는 편인 남편이 웬일로 강릉행 새벽 5시 첫 기차라는 결정을 내렸다. 기차 사랑 아들을 둔 우리가 그걸 안 타볼 수 없단다. '우리 정말 일어나서 갈 수 있을까?' 설렘과 걱정을 안고 시시덕거리며 잠들었다. 다음 날 추위에 단단히 채비한 뒤 어둠을 뚫고 역에 가는 길, "새벽 4시인데 꼭 저녁 7시 같아 엄마!" 생전 첫 경험에 잔뜩 신난 여덟 살 목소리. 강릉에 도착하니 오전 7시, 바다열차를 타고 삼척에 도착했는데도 오전 9시. 얼큰한 곰치국을 먹고 빨랫줄에 잔뜩 널린 오징어들을 봤다. 삼척 택시기사님은 "바다열차 그 바다도 얼마 안 보이는 그거 없어질 만하지요!" 하며 웃으셨다. 명성에 맞던 강릉 커피 맛도, 박물관 축음기와 영사기도, 기차 시간 때문에 놓친 맛집도, 하루 사이 일어난 일이라기엔 별별 표정이 가득해 우스웠던 날.
여행의 묘미는 다시 돌아오는 것에 있다. 코끝 빨개지고 어깨 지끈한 생고생을 한 뒤 현관에 들어서면 지겹던 거실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여행과 같은 나의 휴직. 직장에 돌아가면 나는 반가움과 밥벌이의 고단함을 다시 느낄까. 그래, 분명 그것도 묘미일 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각 못했던 방식으로 우리의 여행은 업그레이드 중이다. 더 걸어도 길을 좀 헤매도 괜찮다. 아이는 하루, 한 달, 일 년만큼 더 자라 듬직한 동료가 되고 있으니까. 전국 지도를 벽에 붙여놓고 다녀온 곳에 색칠하는 이 뒤에서 어른 둘도 사뭇 의욕적으로 "전라북도가 비었잖아? 다음엔 전주로 가야 겠네." 하며 거든다. 지역 홈페이지에 들어가 홍보책자 우편 신청을 미리 한다. 몰랐던 지명과 역사를 안다.
복직 전 마지막 여행지는 공주와 대전이 될 예정이다. 물론 복직 이후에도 여행은 이어진다. 낯섦에 긴장하고 고생에 한탄하면서도 흩뿌린 수선 속 돌아올 즐거움을 확신하기에. 혼자 또는 둘이 다닐 때와는 다른 고생과 재미가 있는 셋의 여행이라서.
올해의 여유는 자주 같이 떠난 추억으로 여물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오래 떠나지 않아도 아주 낯선 곳이 아니어도 좋았다. 내가 기억할 것이다. 그러니 나중에 아이가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