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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리 Nov 18. 2023

여덟 살을 믿으세요

혼자서 잘하는 것이 늘고 또 늘어서


"어머니, 윤이 지금 출발하니 이따 내다 봐 주세요."


피아노 학원 앞에는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가 있다. 그곳만 선생님이 같이 건너 주시면 이후부터는 혼자 아파트 연결다리와 단지 내 도로를 지나 집에 올 수 있다. 전화 온 때로 짐작하자면 머지않아 베란다 아래쪽 보도에 모습이 보일 것이다. 창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얼마 되지 않았는데 몇 분이나 지난 느낌에 자꾸만 시계를 본다. '어두워지는데 괜히 혼자 오게 했나.' 후회가 슬금슬금 오를 쯤에야 저 멀리 익숙한 머리끝이 보인다. 안도의 숨을 모아 이름을 부른다. 아이도 올려보며 손을 흔든다. 이제 마지막 관문인 단지 내 경사 도로만 남았다.


"지금 건너면 되지?"

"응, 뛰지 말고 천천히!"


잠시 후 삑삑 들려오는 현관 비밀번호 소리. 문을 여는 여덟 살 자태가 의기양양하다. 나도 부러 더 꽉 끌어안고 추켜세운다. 제법이네. 언제 이렇게 잘 다닐 만큼 컸어? 요 며칠 반복되는 우리 집 늦오후 풍경이다.




엄마, 나 이제 혼자 다닐래.

사실 내 의지는 아니었다. 어차피 복직 후면 피할 수 없는 일인데 굳이 앞서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할 수 있는 때까지는 같이 다니고 싶었다.


아이더러 이제 혼자 다녀도 되지 않냐 투덜대면서도 좋았다. 선배에게 언제까지 등하교를 같이 해야 하냐 물으면서도 행복했다. 특히 근린공원 벤치에 앉아 준비해 온 간식을 먹이며, 방과 후 수업에서 만든 로봇을 꺼내드는 아이와 함께 종알대던 대낮의 하굣길을 기억한다. 학원을 가던 길에 갑자기 한 시간 후 시내버스 여행을 약속하던 모험은 얼마나 피곤하고도 즐거웠나. 초여름 더운 볕을 피해 가로수 그늘만 요리조리 골라 함께 걷던 시간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기억이다.


아직 작고 서툴어 보호해야 하는, 고학년 누나 형아 옆에 있으면 말 그대로 병아리인 나이. 달리 보면 꽤 커서, 많이 걷고 멀리 다녀도 되고 제 생각이 분명해 대화하는 재미가 있는 나이. 유아와 학생의 중간에서 빠르게 자라는 우리 여덟 살. 따라서 혼자 다니겠다는 말은 다음 단계를 향해 잘 크고 있다는 증거로 반겨도 될 법한데, 한편으론 '정말 많이 커 버렸구나….' 싶어 마음 한 구석이 쿵 내려앉는다.


승낙을 주저한 것은 시원섭섭한 감정 때문만이 아니다. 지상으로 차가 많이 다니는 우리 아파트와 인근 길이 위험해 보인다는 현실적인 문제. 아이 성화에 못 이겨 약속한 동선 내에서 시간차를 두고 집에 갔던 날,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남편은 아직 따로 다니긴 이르지 않냐며 나보다 걱정을 앞세웠다.


동네를 걷다 보면 1학년들이 혼자서 참 잘 다닌다. 친구 어머니가 한 번은 뒤를 따르며 지켜봤다고 했다. 아이들은 떠들며 뛰다가도 주의할 곳에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멈추고 좌우를 살피며 잘 다니더란다. 교통안전에 대해서 배운 그대로, 어른보다 더 정확하고 바르게. 어린이의 성장과 자립을 믿어주는 건 한마음인지, 교문이나 학원 문 밖에서 기다리던 어른들도 확연히 줄었다. 껌딱지일 것 같던 우리 아이도 갑작스레 용기를 입에 올린다. 친구들, 다른 어른들, 우리 아이까지 모두 마치 애벌레가 번데기, 나비가 될 때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이.




하나둘 알을 깨고 나가는 옆에서 나만 아이가 깨고 나온 알을 무시할 수는 없다. '너는 못 해.' 하며 언제까지나 품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가능한 범위에서 안전망을 갖춰두고, 할 수 있다 말하며 문 열어줘야 한다.


지난주, 집에 두었던 핸드폰 공기계를 개통하여 아이의 번호를 만들어 주었다. 이제 정말 혼자 다녀도 떨리지 않는다며 환호하는 아이의 곁에서 나와 남편도 마음으로 작은 축포를 터뜨렸다.


그제는 저기까지, 어제는 여기까지 더 가 봤다. 반대로 나와 함께 가는 거리는 점점 더 짧아진다. 하루하루 지나면 완전히 혼자 다닐 날이 올 것이다. 기다리던 때인데도 상상하는 순간 벌써 섭섭하다. 같이 다닐 수 있는 지금을, 겨울의 하굣길을 흠뻑 누려야지.


내 복직은 한편으로 아이의 독립이기도 하다. 스스로 도전할 수 있는 세상에 놓아주고 뚜벅뚜벅 뒤로 물러나 응원할 준비를 한다.








(*초등학교 1학년생은 만 6~7세이지만, 기존에 알던 나이의 말맛을 살리고자 이 글에서는 8세로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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