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시간> 3일 오전 속성 과정
수요일. 북카페에 가다.
이유 없이 메슥거린다는 아이를 돌보느라 죽 끓이기와 약 먹이기에 전념했던 나흘. 주말 이후 이틀은 학교도 못 보냈고 남편은 3박 4일 워크숍을 떠났다. 열이 없어서, 직장 걱정 없이 돌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 여기며 내 시간은 그 자리에 익숙하게 멈췄다.
나아지는 모습을 확인했음에도 걷는 내내 혹시 다시 돌아가잘까 조마조마했다. 교문 앞 멀쩡한 표정을 확인한 다음 빨간 볼 아래 목도리를 여며줬다. 손 흔들 준비를 하고 운동장 끝 현관까지 지켜보는데, 어쭈, 이제는 돌아보지도 않네. 적응했다 이거지. 대견한 것. 여하튼 난 이제 자유다. 만세!
등교에 좌절하지 않을 내일이 온다면 이렇게 하리라 꿈꾸었던 일을 바로 실행하기로 했다. 밤사이 길이 얼음판으로 변했지만 상관없다. 집 근처에 비슷한 장소가 있겠지만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은 사양이다. 그렇다고 먼 건 또 부담스럽지. 지하철 다섯 정거장 정도의 거리, 혼자 먹기 좋은 밥집과 구경할 골목이 많은 동네로 가자. 세수하고 머리를 질끈 묶으며 바로 출발.
망원역 근처 북카페 문을 열었다. 주인인 전직 아나운서의 이름 때문이 아니라 책에 집중하기 좋다는 지인 추천에 끌렸다. 1층은 서점, 2층은 카페. 2층 책은 자유롭게 읽어도 된단다. 편안한 나무와 벽돌색, 서점 특유의 종이 내음, 창 너머 내려다 보이는 작은 마당의 눈밭과 새어 들어오는 햇살, 방해받지 않을 정도의 음악과 온도. 처음 먹어 본 흑임자 라떼마저 참 맛있다.
가방에 넣어 온 한 권은 스스로에게 낸 숙제였다. 판형이 작고 두껍지 않으니 여기서 다 읽을 수 있으리라, 그래야 떠나리라, 맘먹고 온 책. 선물 받은 것이라 집중해 읽으려 아껴둔 참이었다. 따뜻한 커피 잔을 몇 차례 들어 올리던 손이 이내 책장 넘기는 데만 쓰였다. 중간 어디쯤에서 눈물까지 똑똑 흘렸으니 청승도 골고루 떨었다. 저릿한 채 뒤표지를 덮고 작가 인터뷰를 찾아봤다. 처음 알게 된 분인데 건너편에 살고 있는 친구 같다.
숙제를 끝냈다고 떠나긴 아쉬운 시간. 바로 옆 책장을 살피러 느릿느릿 일어섰다. 손끝이 겨우 닿는 위칸에서 눈에 익은 이름이 보였다. 연락하고 지낼 사이까진 되지 못하는 대학 친구의 신간을 여기서 확인하네. 얼마 전 남편과 얘기 나눈 제철음식 책도 있다. 몇 구절을 찍어 문자로 보냈다. 책등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책들이 가지각색으로 궁금하고 재미있어 보였다. 같은 분야끼리 모여있는 도서관이나 서점 책장과는 영 딴판의 매력이다. 사장님, 이건 정말 허투루 꽂아둔 장식이 아니군요.
까치발과 90도 폴더인사를 번갈아 하며 낚시하듯 책들을 잡고 또 놓았다. 그러다 오래 쥔 한 권의 책. 줄간이 넓고 편안한 문체라 술술 읽혔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또 작가의 이야기를 찾아봤다. 독서의 만족을 권 수로 따지는 게 얼마나 어리석냐마는, 마치 내 소중한 시간을 두 가지 다른 선물로 바꿔 받은 것 같아 뿌듯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런 착각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미뤄둔 허기가 몰려왔다. 얼른 먹고 돌아가야 하교시간도 맞춘다. 문을 밀고 나가자 얼음 바람이 손과 볼을 때리듯 했다. 황급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세워 올린 외투 깃에 목을 움츠렸다. 포실하게 쌓인 앞마당 눈 위 수줍은 눈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며 저벅저벅 건물과 멀어졌다. 얇고 야들한 수제비를 먹을지, 주말에 웨이팅이 길다는 태국 음식점을 갈지 고민하다 후자를 택했다. 식사 후엔 바로 지하철을 타기 아쉬워 일부러 시장 길을 돌아 걸었다.
목요일. 미용실에 가다.
올 초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파마를 했었다. 다시 겨울이 온 지금까지 특별히 손대지 않고 자란 머리카락은 파마도 제법 풀려 가슴팍까지 길어졌다. 반곱슬에 숱도 많다 보니 산발은 편치 않아, 일명 똥 머리로 묶고 다녔었다. 주먹 크기로 매달린 뭉치는 어찌나 묵직한지 중력을 실감할 정도였다.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불은 것인지라 막상 많이 불편한 느낌은 아니었다. 긴 머리가 잘 어울린다고 믿기도 했다. 아, 하지만 어쩌랴. 거울 속의 나는 자꾸만 갸웃해지는 몰골인 것을. 심지어 가까운 미래에 복직을 앞둔 운명. 출근하려면 머리 말리는 시간이라도 줄여야 하지 않겠나. 남이 대신 머리를 감기고 말리고 손질해 주는 기쁨을 어서 떠올리자. 몸을 움직이자.
"그동안 무거우셨겠어요."
인터넷에서 광고를 걸러내고 지인 추천을 조합하여 찾아간 미용실. 칭찬이 자자하던 후기답게 궁금하던 것들을 묻지 않아도 먼저 얘기해 주신다. 어느 부분에 숱이 많고 적은지, 건조한 모발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내게 가장 적합한 길이와 모양이 뭔지, 하물며 미용실 아닌 집에서 뿌리 염색하는 방법까지…….
파마를 하지 않으니 꼼꼼히 감고 말리고 자르고 상담까지 해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직 가위와 빗만으로휴직 기간 쌓인 어떤 종류의 무게를 내려놨다. 미용실 원장님이 바닥을 가리키며 웃으신다.
"이게 다 고객님 머리카락이에요."
"네, 너무 시원하고 후련해요."
우리 집 여덟 살짜리의 커트와 같은 가격이다. 시간과 돈을 적게 들이고 작은 행복을 얻어간다. 홀홀히 가벼워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언 손을 호호 불며 총총 걸었다. 얼른 집에 가서 따끈하게 너구리 라면을 끓여 먹으리라 생각하면서.
금요일. 영화관에 가다.
혼자 간 적이 없었던가? 설마 진짜 없기야 하겠나.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 사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렇다. 나는 혼자 영화관에 간 적이 없다.
오늘은 아이 학교 방학식이 있는 날. 복직까지 일주일이 조금 넘게 남았지만 그 기간은 방학으로 채워질 예정이다. 즉, 특별한 프로그램에 보내지 않는 한, 내가 맘 편히 혼자의 오전을 쓸 수 있는 날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뭘 더 고민하랴. 시간 안에 다녀올 수 있는 영화관의 영화 시간을 찾는 것이 긴급 미션. 요즘따라 보고 싶은 영화가 두 개나 생겼으니 때가 잘 맞아 다행이다.
성인 1명 표를 결제하고 이번에도 집에서 뛰쳐나가다시피 출발했다. 그제는 지하철, 어제는 자차, 오늘은 버스로 목적지에 닿았다. 방학식이라 단축 수업을 한댔으니 하교 시간도 더 빨라지는 날. 돌아갈 시간을 생각하면 점심 먹을 시간도 모자라겠기에 내키지 않지만 핫도그 세트를 주문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광고타임 내로 다 먹고 정좌하는 사람이 되어 보자.
좌석을 찾아 앉았다. 근 십 년간 옆자리는 늘 남편이었는데 불편한 타인을 양 옆에 두고 앉으니 콜라를 왼쪽에 둘지 오른쪽에 둘지 심각하게 고민되었다. 들었다 다시 내릴 곳을 못 정해 허벅지 위에 컵을 놓은 사이, 왼쪽 남자가 빈 뒷자리로 이동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저는 이제부터 왼쪽 팔걸이로 몸을 기울입니다.
2시간 10분여의 시간. 핸드폰 화면을 보거나 멈춤 버튼 누르는 일 없이, 도중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딴짓할 일 없이 한 편을 다 본 게 오랜만이다. 믿음직한 감독이 엮은 이야기는 처음에 나를 푹 꺼지게 하다가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들었다. 언젠가부턴 발을 동동거리게 하다가 바람에 닿는 듯하게도 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랐다. 영화를 선택한 건 잘한 일이다.
돌아가는 길, 옆 건물 문구점에서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지를 샀다. 산타가 주는 것이니 이걸 든 채로는 교문 앞에 갈 수 없다. 집에 들러야 한단 생각에 마음이 바쁜데도 실실 웃음이 났다.
보름 여 뒤 출근을 앞둔 자의 다급한 벼락치기.
며칠 전 아이 친구 어머니들과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었다. 방학의 고단함은 워킹맘 전업맘 상관없이 보편적인 것. 첫째가 4학년인 어머니 한 분이 말씀하셨다. 본인은 아이들 방학 전에 꼭 혼자 영화관에 간다고. 그래야 시작할 힘이 생긴다고. 다른 한 분은 미용실에 갈 것이고, 또 다른 분은 치과 치료를 서두를 것이란다. 며칠 뒤 사라질 정신줄과 시간을 안다. 그러니 모두가 자녀의 방학을 맞이하는 나름의 준비 의식이 있다. 태풍 예보를 들으며 창문에 박스 테이프라도 붙이듯이.
복직과 방학을 코앞에 두고, 달라지는 일상 대비에 나를 위한 챕터도 넣어야 한다. 아이와 부엌 말고 나도 주인공이다. 그동안은 아이 스케줄 짜기나 브런치북을 마무리할 방법과 같이 덜 끝낸 숙제들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야 뒤늦게 질문을 던진다. 그럼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 놀지?
북카페, 미용실, 영화관은 주말이나 휴가를 쓴 평일에도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곳들이다. 하지만 지금과 조금은 다를 것이기에 법석을 피워보았다. 더 자주 전시회도 가고 공연장도 가 봤으면 좋았겠다. 미용에 관심이 있었다면 피부과랑 네일숍도 갔을 텐데. 모래시계 위칸이 거의 다 비워지고 보니 혼자 놀거리들이 뒤늦게 아쉬움으로 떠오른다. 수영이나 테니스 같이 제대로 배워봤으면 좋았을 운동을 시작하지 않은 것도.
일 년이 인생의 전부가 아닌데 하루하루에 애태울 것 없다. 해 온 것들만으로도 충분히 좋았으니까. 삼일의 소소한 벼락치기는 이렇게 글자로 남겼으니 됐다. 더 재미있게 놀아볼 미래의 장작으로나 써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