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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리 Nov 26. 2023

영어 스터디가 이상해

자랑하고 싶은 번역 공부

의지하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다. 운영자 분이 영상 번역가이신데 스터디를 모집한다 하여 손을 들었다. 그렇게 타임지 번역 스터디를 시작했다. 이번 달로 5개월을 채웠다.


아이들과 같이 여행하고 체험하며 즐겁게 다니는 것에 공부보다 더 큰 가치를 두는, 이상(異常)하고 이상(理想)적인 부모들이 모인 커뮤니티다. 영어와 관련 없이 체험 정보와 일상 글이 오가는 사랑방의 파생 모임이다 보니, 목표 점수가 있거나 공부 자체에 필사적이지는 않다. 2시간 수업 후 맛있는 밥 먹으며 술도 곁들이는 추가 2시간의 수다가 어쩌면 더 매력적인 것. 이때 하원이나 하교를 챙겨야 하는 이는 가고 남을 사람은 남는다. 모든 멤버가 엄마이다 보니 갑자기 사정이 생기면 줌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때로 가능한 범위에서 날짜나 시간을 변경한다. 배려심 가득한 공부 모임이다.


참여 결심을 처음 말한 날, 남편 눈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휴직 기간은 한정적인데 원래 하고 싶다던 것부터 집중해야 하지 않겠어?"


뜬금없어 보일 만하다. 휴직 계획서에 외국어 공부를 언급하긴 했는데 큰 의미를 두고 쓴 말은 아니었다.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뒤에서 세는 게 빠를 것이다. 설령 영어 공부를 한다 해도 토익 점수를 올리거나, 리스닝에 도움 되는 미드 취미를 붙이거나, 화상 영어로 일상 회화 자신감을 가져보는 게 현재 내 상황에서 상식적이지 않겠는가. 갑자기 번역이라니, 취업 준비 이후로 손 놓은 독해라니.


"맞아. 근데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


엄마로서가 아닌 나 자신으로 만날 사람이 급격히 줄어든 휴직 기간. 집에서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살림하고 아이 돌보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좋은 사람과의 소통, 무엇이든 밖으로 나가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 스터디는 조건을 갖췄다. 사람 대 사람으로 실력을 알고 맞춰나가는, 빡빡하지 않되 꾸준히 할 수 있는 공부. 휴직기간이 아니라면 절대 할 수 없는 평일 낮 시간의 오프라인 모임. 해서 후회할지는 불확실하지만 안 하면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았다.




축제로서의 마라톤 대회에 자주 참여하던 무렵의 일이다. 결승선을 넘고 한참 숨을 고른 후, 현재는 남편이 된 당시의 남자친구가 말했다.


"학교 때 오래 달리기 하라고 시키면 정말 하기 싫었는데, 이건 이렇게 힘든데도 뛰게 되네.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거라 그런가 봐."


해야하는 일과 하고싶은 일의 차이. 학창 시절과 취업 준비기, 봐야 해서 보는 영문에는 즐거움이 없었다. 문제를 맞힐 수 있을 정도의 의미 파악만 신속히 하면 됐으니까. 기술적 직독직해. 그마저 제대로 배우지 않았던지 정답에 늘 자신 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앞뒤 맥락 없이 일부만 똑 떼어 놓은, '문제를 위한' 지문인지라 인상적이지 않았다.


반면 내가 원해서 하는 독해는 재미있다. 급하지 않고 편하다. 순수하게 글 전체를 이해하고 읽어내려다 보니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 정확하게 본다. 글쓴이의 의도를 찾는다. "대강 이런 뜻이잖아요?" 하며 게으르게 이해하던 습관을 놓는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비슷한 줄 알았던 의미가 한글 조사 하나로 전혀 달라진다. 정확한 해석을 모아 통째로 다시 읽으면 개안 수준으로 보인다. 후련한 마음이 든다.


번역은 문장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정확한 문법적 해석을 기본으로 하되, 어떤 한국어를 가져와 원래 의미를 해치지 않으면서 매끄럽게 표현하느냐의 기술. 그러니 같은 영어 문장으로 옆 사람과 나는 다른 말맛을 만든다.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문장 짓기를 좋아하고 딱 맞는 단어를 찾을 때 희열을 느끼는 나에게 번역 공부는 이런 점에서 취향 저격이다. (실력과 취향은 다른 문제이니까 이렇게 쓴다. 재미있다고 하였지 잘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고작 5개월이지만 긴 문장에 겁을 덜 먹게 됐다. 끝을 알 수 없는 관계절, 삽입구, 도치 구문을 보며 영어가 모국어인 필진의 무자비함에 탄식하다가, 이제 아주 느리게나마 방향을 잡는다. 박물관 전시실에서 영문 설명을 읽어보려는 용기와 허세마저 생겼다. 아이에게 읽어주는 영어 그림책에서 생략된 구문 때문에 해석이 안돼 쩔쩔매는 일이 더는 없다.




스터디의 매력은 다른 데 더 있다.


봤던 기사 중 몇 가지 주제를 써 보겠다. 미국 방직공장에서 일한 소녀들이 수다를 매개로 어떤 업적을 이뤄냈는지, 전 세계 인구의 2%에 달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간성(Intersex)인의 권리에 대한 주장, 뉴욕시 전 시장과 그의 아내가 합의 하에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과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는 선언, 인간이 AI를 학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AI 복지에 대한 주장, 미국 CIA 요원 아내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스스로 침묵하는 것(Self-Silencing)이 어떻게 여성을 병들게 하는지, 소셜 미디어에서 일부러 괴로운 뉴스를 더 찾아보는 행위(Doomscrolling)를 어떻게 멈춰야 할지 …….


너무 흥미롭지 않은가? 매번 최신 기사를 정하기 때문에, 이제 막 세상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야깃거리가 많다. 생각지 못했던 내용이라 신선하다. 자연스레 관련 도서나 다른 뉴스도 연결하게 된다. 집에 오면 남편을 붙잡고 더 이야기 나눈다.


전날부터 단체 채팅방에서 번역보다 더 열띠게 논의하는 식사 메뉴, 수업이 끝난 후 착착 도와 차려지는 밥상, 이어지는 소소한 대화 또한 특별한 기쁨이다. (장소는 선생님 댁 거실이며, 주로 배달주문을 하지만 밀키트나 부재료를 십시일반 모아 간단한 요리를 해 먹기도 한다.)




‘지금 번역 공부라는 것을 하고 있어도 되나. 시간은 계속 가고 나는 다른 걸 더 하려 했는데.‘ 가끔 조바심에서 오는 의구심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막상 가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이게 맞지. 다음 달도 계속해야지.' 다짐하며 돌아오게 된다. 남편과 아이 앞에서도 괜히 힘주어 말한다.


"이 스터디는 영어 말고도 다른 힘을 주는 게 확실해."


인터넷에서 이런 대화를 본 적이 있다. 사회성을 키우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질문에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야지. 나쁜 사람들 옆에서 사회성 좋아봐야 너만 비슷한 사람 되는 거야.' 라고. 이 소모임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라는 믿음을 기반으로, 내게 부족한 사회생활의 숨을 안전하게 불어넣어 주는 것 같다. 매주 고정적으로 만나는 여섯 명의 동료가 주는 익숙함과 안정감. 유익하기까지 한 작은 숨구멍.


아쉽지만 복직 전 한 달은 안팎으로 준비할 것이 많아 다음 주 마지막 출석을 할 예정이다. 휴직 생활 중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진한 무늬 하나가 생겼다. 이 무늬가 앞으로 내 삶의 무엇과 또 이어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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