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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리 Oct 20. 2023

손님, 방 좀 빼 주세요.

비우기 어려웠던 자의 강제 수행기 (2)

(앞 글에서 이어집니다.)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방이 하나 있다. 베란다를 확장한 데다 창이 북향이라 겨울이면 꽤 추운 방. 이사 첫 해 장마철을 보내고 나니 외벽 누수로 마룻바닥에 얼룩이 생겨, 현 집주인과 전 집주인 사이 책임론에 낀 채 불편하게 공사를 진행했던 방. 살던 이가 두고 간 붙박이장이 이제 보니 골칫거리인 방.


한때 재택근무 공간으로 삼겠다며 책상을 놓아 보기도 했다. 키보드에 얹은 손이 시려온 탓에 머지않아 다시 옮겨야 했지만. 안락함에 하자가 있음이 명백해진 이 방은 결국 수납 삼 형제가 주인이 되었다. 세 칸짜리 붙박이장 안에는 덮지 않는 이불, 계절 옷상자, 만들기 작품, 기타 등등의 잡동사니가 채워졌다. 책장에는 자주 손이 안 가지만 소장하고 싶은 책들, 사진 앨범, 보드게임 상자와 장난감 피규어 몇 가지가 들어갔다. 서랍장에는 아이 장난감을 주로 보관했다. 실제 용도는 창고에 가까웠음에도 우리 가족은 이곳을 태연히 ‘놀이방’이라 칭했다. 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안 쓰는 물건들 때문에 놀기 불편하다며, 이름에 걸맞게 쓰게 해 달라고 종종 항의했다.


놀이방의 위신을 세워줄 만한 장난감은 단연 레고 블록이었다. 어린이날, 생일, 산타 할아버지께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몇 해에 걸쳐 모이니 양이 제법 많아졌다. 설명서대로 만드는 것도 재미있지만 아이는 완성된 형태를 오래 두고 이용하는 역할 놀이를 즐겼다. 기어이 몇 달 전부터는 가지고 있는 시티 시리즈를 모두 연결해 제대로 된 도시를 만들고 싶다기에, 별 쓰임 없는 방 바닥을 허락했다.


해체 기한 없는 블록이 전체에 깔리면서부터 그곳은 더 이상 용도에 의심이 없는 방이 되었다. 기찻길과 시청, 연구소, 공원, 빵집, 의문의 건물들, 크기가 다양한 자동차들이 채워졌다. 아이는 기차와 버스에 사람을 태웠다 내리며 안내 방송을 하며 놀았다. 바라보는 나도 흡족했다.





발 디딜 틈 없는 소인국을 완벽히 청소하기는 무리였다. 좁은 입구의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고 털고, 부분 부분 옮겨가며 나름대로 한다고는 했다. 크게 문제는 없다고, 지겨워하기 전에는 더 있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거의 한 계절을 넘길 때까지 두었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약간 습하고 장 안에 책과 옷, 이불, 물건이 많은 곳. 바닥에 한참 장난감이 늘어져 있는 곳. 불청객을 모시기에 딱 좋은 조건이다.


어느 날 방에서 놀던 아이가 나를 불렀다. 기찻길 사이 작게 움직이는 것이 있단다. 가서 들여다보니 점보다 작아 얼핏 보면 눈치도 못 챌 벌레다. 그러니 무섭지 않다. 어디서 잠깐 들어온 것인가 보다. 이 정도는 문제가 안 된다는 듯 당당하게 잡았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아이가 말했다.


"엄마, 여기도 있어.


휴지를 다시 손에 쥐었다. 옆을 봤다. 하나 더 있다. 어라, 저기 또 있다. 그제야 머리에 빨간 불이 켜졌다. 뭔가가 잘못되었구나.






스마트폰 검색 화면에 코를 박았다. 이름은 '먼지다듬이'래. 아무래도 이게 맞는 것 같네. 습하고 책이 많은 곳에 잘 생기는구나. 메밀베개가 원인일 수 있으니 빨리 치우라네.


아이더러 하는 말 같지만 사실 깜깜해진 눈앞을 어떻게든 밝혀 보려는 혼잣말. 중간중간 절망스러운 한숨을 내쉬는 사이, 아이는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는 듯 천진하게 종이와 펜, 가위를 찾는다. 오린 종이에 뭔가를 쓰더니 부산스럽게 색칠까지 한다. 경찰이나 소방대원이라도 된 것처럼 바쁘다.


[ 안전'재'일. 출입금지. 절대로 들어가지 마세요. ]


방문에 긴 띠가 둘러졌다. 알록달록 레고 제국이 허무하게 멸망했다. 큰 대야를 놓고 덩어리째 부숴 담으며, 출입 경고 띠 아래로 허리를 숙여 화장실을 오갔다. 식초물에 담가둔 뒤 채에 걸러 씻고 거실 바닥과 베란다 건조대에 넓게 깔아 둔 수건 위로 옮겼다. 작은 조각들은 전용 도구로 하나하나 분해했다. 바닥만 정리하면 일단락되지 않을까 했던 생각은 오산이었다. 청소용 테이프로 확인할 때마다 좌절이 함께 묻어 나왔다. 대체 어디서 나오는 벌레일까. 방을 모두 벗겨내는 수밖에 없다. 긴 싸움이 되겠다.


뚜껑이 고정되는 통을 사서 시리즈별로 분류해 넣고, 이불들을 고온에 세탁해 말리는 작업도 동시에 진행했다. 일상복 빨래를 병행하고 비 오는 날 쉬어가다 보니 오랜 기간이 걸렸다. 불청객의 본거지 가능성이 있는 것은 75리터 쓰레기봉투에 죄다 버렸다. 기증 가능 물품은 세탁 후 박스를 마련해 담았다. 좁다란 거실에 시골집 마당 고추처럼 널린 레고 조각들과,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 사용 여부를 분류해 달라 아우성치는 물건들. 아침에 일어나 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며칠 째 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했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목욕탕을 떠올린다. 치히로가 오물 신의 몸에서 가시 같은 것을 빼내기 시작한다.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가 밧줄에 엉켜 줄줄이 빠져나오고 비로소 강의 신은 본래 모습을 되찾는다. 이 작은 방에서 자잘한 물건이 끝도 없이 나오는 게 그 모습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때의 추억이며 다시 쓸 수 있는 물건들이라 오물에 비유한 것이 적절하지 않지만, 눈앞 모든 것이 일거리인 내게 지금 당장은 그렇다.







왜 여름을 나면서 습도 관리도 제대로 못 한 걸까. 미련하게 왜 많고 작은 장난감을 오래 깔아 뒀을까. 안 쓰는 종이와 책은 왜 재깍 버리지 않았나. 이불을 넣어두곤 왜 무관심했나. 들숨 날숨에 과거의 나를 원망해 본다. 철마다 정리와 기증을 하긴 했던 터라 억울하기도 하다. 규모가 지금과 다를 뿐. 후회해 봤자 바뀌는 건 없다. 이번 일로 배운 셈 치자.


근래 회사 일로 몹시 바쁜 남편은 상황을 전할 때마다 '너의 휴직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손 쓸 도리 없이 방 하나 없는 셈 살아야 했을 것'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물고기 은동이와 친구들의 싸움처럼, 9년 차 냉장고의 고장처럼, 지겹지만 이 사건 역시 내가 선두에서 해결해야만 한다. 물러날 곳도 대신해 줄 사람도 없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문제 방은 적들로부터 완전히 탈환하지 못했다.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는 하지만 아직 100%로 없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작은 방 하나를 쓰지 못하기에 집안 곳곳에서 자리를 잃고 방황하는 물건들이 여전히 많다. 급한 불은 껐다며 일상 과업을 핑계로 완결을 미뤄두다가 종종 '아, 저 방 어떻게 좀 해야 하는데...' 하며 이마를 짚는 날들이다. 아이가 방을 언제 쓸 수 있냐고 질문할 때마다 "아직 약 뿌려 놔서 안 돼." 라 대답하는 것도 민망스럽다. "엄마, 오늘은 저 방 꼭 좀 치워줘?" 외치며 학교 간 아이에게 저녁에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장난감이고 책이고 남김없이 싹 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른 채, 엄마도 이 정리 대란이 끝나길 간절히 바란다고 남 일처럼 얘기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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