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탈리 Aug 05. 2023

65%만 하라

엄마와 직장인,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복직 후 한동안은 저녁마다 회사 앞에서 어린이집 셔틀버스를 타고 온 아이를 맞았다. 사내 어린이집이 다른 사옥에 있어 부득이 그러했는데, 실내가 아닌 곳에서 기다리는 아이, 선생님, 기사님을 생각하면 퇴근 시간을 어느 수준 이상은 늦출 수 없었다. 사무실에서 반드시 사라져야만 하는 데드라인을 가진 자라니, 하릴없이 유별난 구멍처럼 보였을 테다. 이를 조금이라도 메우려면 일로써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야근이었다. 그것만큼은 최대한 피해야 했다. 내 몫을 분담하는 가족의 무게, 기다리는 마음과 시간의 농도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무 시간 내 전력을 다했다. 분주히 움직여 야근 이상의 일을 마쳤다. 그러면 더 빨리 퇴근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상했다. 잘하려 할수록 칭찬의 얼굴을 한 과업이 유턴하여 돌아왔다. 끝은 다른 시작으로, 어제의 승인은 내일의 백지로 변했다. 목적과 역할이 불분명한 일을 위해 팀원들 모두가 남는 밤이 이어졌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무기력하게 말라갔다. 화장실에서 받은 영상통화 화면 속 아이의 붉은 눈이 선명했다. 언제 끝나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워킹맘 티 나지 않게 하라', '일을 다 마쳤더라도 더 있다 가라'는 조언의 목적은 분명 배려였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 참 간단한 사회생활 요령인 것이 나는 유독 괴로웠다. '이번 승진은 너'라는 말들 사이에서 일했다. 욕심내지 않았다. 이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되어야 한다 생각했을 뿐이다.


점차 운이 없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내부 사정들이 생겨났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애 엄마 직원’으로 손쉽게 정의됐다. 나는 그 해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더 이상 채울 수 없을 만큼 꽉 찬 잔에 물방울을 똑똑 떨어뜨리는 날들. 다른 워킹맘들과 비슷하면서도 들여다보면 조금 달랐다. 사주나 신점을 떠올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마음을 먹자마자 가장 가까운 시일 내 회사 근처에서 점심시간에 볼 수 있다는 곳을 찾았다.


얼마나 용했던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실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중요하고 기억나는 것이란, 모르는 이가 내 속내를 알아주는 데서 오는 후련함과 그에 맞장구치며 더 털어놓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였다. 삼재에서 오는 운의 막힘과 내 천성과의 콜라보를 자연스럽게 쏟아내는 역술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가 매섭게 변한 것은 내가 이 말을 했을 때부터다.


"일도 잘하고 싶고 좋은 엄마도 되고 싶어요."

"못 돼요. 그냥 하는 만큼만 하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정신 차리세요. 오죽하면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는 말이 있겠어요? 모든 일을 65%만 한다고 생각하세요. 더 하려고 하지 말고 돌려받으려고도 하지 마세요."


초자연적인 점술과 미신의 세계와는 별개로, 징징대는 딸의 등짝을 찰싹이는 엄마의 말과 유사한 대화. 부끄럽게도 이 대화가 마음을 고쳐먹는 약간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서 주저앉아 우는 꼴이었음을 알았다.




아이를 대할 때의 생각부터 다시 봤다. 어차피 좋은 엄마가 아니라잖나. 나의 학창시절을 잣대로 아이를 다그치고 잡지 않기만 해도 다행이란다. 오, 그럴싸하다. 좋고 말고가 아니어도 괜찮다. 딱 65%만 하면 된다. 70까지도 필요 없다. 65라는 숫자가 너무나 엉뚱하여 참 편하게 느껴진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삶이란 순진한 열심과 최선만으로 올곧게 흘러가는 것이 아님을 근속 10년을 코앞에 둘 때쯤 완전히 받아들였다. '승진은 기운이 모이는 어느 해에 우연히 하는 것'이라는 선배의 말에 이보다 정확한 표현은 있을 수 없다며 웃는 내가 됐다. 예전의 불안은 시간의 가치와 평가를 남에게 맡겨두어 생긴 것. 이제 나는 내가 평가한다. 모든 것을 잘할 수 없음을, 역량을 마음껏 끌어올릴 수 없음을 인정한다.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 역시 내 선택이다. 이 정도면 잘하고 있다 생각하면 넉넉히 흡족하다. 워킹맘이 아닌 '척' 하라는 말을 따른다 하여 내가 워킹맘인 걸 아무도 모르지 않는다. 워킹맘인 것 '치고' 어떻다는 칭찬을 받는다 하여 기쁠 일도 아니다. 힘을 빼고 일한다. 모든 이에게 좋은 사람이기를 포기한다.


65%로 살리라. 숫자를 딱 맞추어 살 순 없더라도 거듭 되뇔 것이다. 습관적으로 액셀을 밟는 나를 브레이크를 밟는 남편이 말린다. 속도를 늦췄을 뿐인데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한다. 흐트러진 것들에 쉽게 좌절하는 나를 더 격렬히 망가뜨리는 아이가 위로한다. 매일 물 주지 않았는데도 아이는 한 뼘 더 자라 있다.


모든 것의 주변인, 그것을 인정한다. 중간으로 나설 수도, 맨 앞에서 달릴 수도, 100으로 채울 수도 없지만 충분히 괜찮다. 오히려 무척 행복해진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