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만한 길 위에서 무작정 힘이 되는 마음
이거 한 번 해 봐.
퇴근한 남편이 종이를 하나 내밀었다. 종이 위쪽에 '산후우울증 자가진단표'라 적혀 있다. 나는 풉 하고 웃었다.
"이걸 뭐 하러 해. 내가 무슨 산후우울증이야."
아기를 재우느라 또 한 번 전투를 치르고 난 늦은 밤, 식탁에 대충 올려둔 종이를 다시 손에 쥐었다. 문항이 그리 많지 않으니 잠깐 해 볼까? 열 가지 정도의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 개수를 세면 된단다. 하나, 둘, 셋, 넷 …. 이윽고 결과를 잘못 봤나 싶어 눈을 크게 떴다. 산후우울증이 맞단다. 내가 지금 우울한 상태라고?
"와하하, 지수가 엄청 높게 나왔어. 말도 안돼."
남편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거 보라고, 부모님께 부탁해 볼 테니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란다. 그도 집에 들어올 때면 무언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전까지 스스로 꽤 긍정적이라고 믿던 사람이었다. 어쩌다 울적한 일이 생긴다 해도 짧게 울거나 가까운 이에게 털어놓는 정도면 금세 기분이 좋아지는 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결과지를 보고 나니 지금까지 알던 내가 아니라는 진단을 받은 듯했다.
이 날의 충격은 몇 달이 지나고야 좀 더 이해가 되었다. 신생아 육아기에는 모두 정도의 차이가 다를 뿐인 산후우울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중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단지 인지할 새가 없는 것임도. 시기 자체가 거의 대부분의 질문에 '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잠을 설치고, 불면증이 있다.' 네, 잘 수가 없는걸요.
'시간관념이 불분명하다.' 네. 밤마다 깨는걸요.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고, 식욕이 떨어진다.' 네, 편안히 밥을 먹지 못하네요.
'초조해지고 나 혼자 있는 느낌이 든다.' 네, 남편과 산후도우미가 계시지 않을 때면요.
새벽에도 3시간에 한 번씩 깨는 것이 당연한 발달 시기의 주 양육자로서, 잠을 잘 못 자고 못 잔 잠이 낮의 컨디션에 그대로 영향을 미치니 온통 Yes, Yes, Yes 투성이다. 아주 잘 자는 아기의 양육자, 긴 밤을 포함해 육아 외주가 넉넉히 이루어지는 이들이라면 조금은 예외였을까.
동기 없는 조리원 선택을 후회한 것은 일종의 불운이었지만, 회사 동기들 중 여럿이 나와 같은 해에 임신과 출산을 한 것은 확실한 행운이었다. 아이가 50일쯤 되었을 때, 몇 개월 앞서 출산한 동기 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언니, 애가 너무 사랑스러운데 자꾸 눈물이 나.」
번개처럼 답장이 왔다. 마음을 잘 안다며 서로의 아기를 데리고 곧 만나자고 했다. 덧붙여 당장 주소를 부르라고 했다. 며칠 뒤 택배로 육아서 한 권이 도착했다. 내가 지나는 터널을 먼저 지나던 시기에 읽고 힘이 난 책이란다.
이후로 엄마인 지인들을 적극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고맙게도 누구든지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우리 집 문을 두드렸고, 때때로 자신들의 집에 놀라오라 초대해 주었다. 막상 낮 시간을 그렇게 보내면 수다를 떠는 데서 힘을 얻을지언정 낮잠 자는 아이를 따라 자지 못해 체력이 부족했기에 자주 그럴 수는 없었다. 또 외출을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동반자가 있기도 했거니와 가까운 거리에 살지 않아 자주 만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피를 못 잡는 밤 핸드폰을 붙잡고 한마디 할 수 있는, 때때로 숫자 1을 없애지 못하고 까무룩 잠들어도 어떤 상황인지 이해해 줄 동지들이 있다는 것이 참 안심이 되었다.
돌 전후로는 문화센터를 다녔다. 낯 가리는 나에게 먼저 말 걸어준 이 덕에 이내 다른 세 명의 엄마들과 수업 후 차를 마시거나 가까운 집에 방문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그중 가장 집이 멀어 늘 아기띠를 하고 센터 셔틀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안쓰러워하며 종종 태워주기까지 하던 언니 한명이 왜 면허가 있는데 운전하지 않느냐고 물어왔다. 너무 겁이 나고 잘할 자신이 없다고, 도대체 운전 어떻게 하느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숨도 고르기 전에 휙 하고 직구가 날아왔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그냥 하는 거지. 그냥 하면 돼.
덤덤히 한 말이겠지만 귀에 오래 남았다. 그 덕에 얼마지 않아 마음을 먹었다. 초보 딱지를 붙이고 대로에 나갈 때마다 '그냥 하는 거다, 그냥 하는 거다.'를 생각했다. 나는 지금 어느 때고 아무 데나 갈 수 있는 운전자가 되었다. 엄마들과의 그 짧은 대화 때문에 내 인생에 강한 무기가 하나 들어왔다.
센터 수업 후 카페에 간 다른 어느 날이었다. 두 명의 아이는 유모차와 아기띠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고, 다른 한 아이는 엄마 허벅지 위에 앉아 손장난 정도를 하면서 놀았다. 오직 우리 아이만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야단스럽게 움직여댔다. 잠들지 않은 아이로서는 당연한 움직임인데도 다른 상황과 비교되는데다 집중해서 얘기하고 쉬고 싶은 마음이 겹쳐 속상함이 밀려왔다. 자꾸만 표정이 굳었다.
도와주며 같이 얘기하던 언니가 내 마음을 읽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말도 오래도록 기억한다. 아이가 자라는 내내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우리 애가 얌전하지?
어제 다른 데 갔을 때는 그중 우리 애가 제일 난리였어.
윤이도 날마다 다르잖아.
자기 눈에는 원래 자기 아이만 유난스러워 보이는 법이래.
사실은 그게 아니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
나는 지금도 아는 이, 모르는 이를 포함한 모든 엄마 사람들에게 의지한다. 매일 오후 한두 시쯤 교문 앞에 마중 나온 엄마들의 마음을 안다. 소아과 의자에 앉아 있는 마음도 안다. 일거리가 남아 늦게 가니 먼저 자라고 아이에게 전화를 거는 차장님의 마음 역시 알 것 같다. 거리의 떼쟁이 자식을 향해 굳히는 표정은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하다.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넬 수 없는 여러 낯선 엄마들에게 자꾸만 눈길이 간다.
모두가 좋은 사람은 아니다. 전부 나와 잘 맞는 사람도 아닐 것이다.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생각하게 하는 이들도 물론 있다. 아이 친구의 엄마들과도 맘 편히 친해질 일은 없어 보인다. 싹싹함과 친화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영 가까워지기 어려운 그녀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일단은 좋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어떤 길을 어떤 마음으로 지나왔는지를 조금은 안다는 동질감, 서로를 도와주려는 선의, 이해하는 마음. 그것이 어딘가에는 똑같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