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행의 기억을 나눌 수 있을까
아찔할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너른 아량을 확신하는 자라 할지라도. 조만간 들려올 불규칙한 소음과 뒤척임을 각오해야 한다. 귀마개를 챙겨 오지 않은 몇 시간 전 현관문 앞을 후회할지 모른다.
어린 승객과의 불편했던 동승기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원망의 화살은 아기를 잘 달래지 못하는 부모에게 돌아간다. 여행 따위는 기억 못 할 이를 고생시키며 제 욕심에 데리고 다니는 어른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몇 해 전, 아버지 환갑 기념 여행을 가기로 했다. 고심 끝에 정한 장소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무난하다는 동남아 한 휴양지. 부모님은 멀리 떨어져 사는 딸 내외와 처음 함께 가는 해외여행에 설렌 기색이 역력하셨다. 나는 17개월 아이와의 여행이 부담스러우면서 어른이 네 명이나 된다는 것을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놓았다.
비행기에서 보낼 시간을 위한 준비물을 최대한 챙겼다. 어른들이 나누어 아이를 돌볼 의지와 이해도 충분히 다졌다. 잠때와 밥때를 알맞게 맞췄다. 화장실이 가까운 앞 좌석에 앉았다. 칭얼거림이 있을 때면 모퉁이로 가 아이를 안고 움직여 주었다. 모든 것이 걱정보다 수월했다.
다행이 불행으로 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착륙 중 안전벨트 표시등이 켜졌을 때 아이가 답답한 듯 버둥거리며 울었다. 앉은 상태로 달랠 수 있는 모든 방법에 실패하며 우리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기내의 고요와 대비되는 소리는 점점 더 거세졌다. 바로 앞 승무원과 걱정스러운 눈이 마주쳤다. 당황해 예외를 구하는 듯한 내 표정을 읽고는 난처해하며 고개를 저으셨다. 안전과 원칙이 우선이다.
바퀴가 활주로에 닿고도 게이트에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은 억겁과 같았다. 내내 이어지는 울음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에야 표시등이 꺼졌다. 환갑 아버지께서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아이를 둥실둥실 달래주셨다. 딸과 사위의 어려움을 도와주려는 마음에 감사하며 덩달아 일어섰지만, 복도에 선 수많은 승객을 보기 죄송해 고개를 숙였다. 그때 바로 뒷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 분께서 등을 토닥이셨다.
“어른도 비행이 힘든데 아기도 당연히 힘들겠지.
말을 못 하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에구, 엄마도 고생했네.”
코끝이 찡해졌다. 누구도 그럴 의도는 없었다는 것을, 말 못 하는 아기란 본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아주는 말 같았다.
얼마 전 만난 친구도 비행기에서 두 돌 아기가 울어 달래는 데 고생했단 얘기를 했었다. 최선의 노력을 하고 처절해진 몸과 마음으로 내리려 할 때, 뒷자리 젊은 커플 한 쌍이 한심하다는 표정과 함께 “컨트롤 못할 아이는 데리고 다니지 말라” 하며 지나쳤다고 했다. 화가 나 대꾸하려던 남편을 본인이 말렸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어차피 저리 말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말해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나 역시 어쩌면 속으로 비슷하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이 동반 가족 입장을 이해만 하기에는 불쾌하고 의아했던 경험이 있다. 작년에 탄 비행기에서 있었던 일이다. 휴양지로 향하는 낮 시간대 항공편이라 한눈에 봐도 영유아가 많았다.
객실 맨 뒷자리에 탄 두세 살 가량 아이가 탑승 직후부터 칭얼거렸다. 신경 쓰일 부모 마음을 알기에 돌아보지 않으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제삼자가 들어도 불편함을 표하고 있는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부모는 조금도 돕거나 해결할 기미가 없었다. 울어도 이상할 게 없는 월령대였다. 설령 생떼일지라도 비행기는 '무시'라는 방법으로 훈육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어머니는 "왜 그래" 만을 연발했다. 짜증스러운 물결로 늘어뜨린 끝. '너 때문에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하는 불만과 방어만 담은 말. 아버지인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람은 일행이 아닌 양 눈 감고 팔짱을 끼고 있다. 이쯤 되니 내가 개월 수를 잘못 짐작한 것인가 싶다. 사실 열 살쯤 되는 걸까. 점점 미간이 찌푸려진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이가 안쓰럽다. 멀리서만 봐도 상태 몇 가지를 체크해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저마다 정답이 다르고 나 역시 말 얹기 쉬운 타인일 뿐인지라 장담과 달리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뭐라도 해 봐야 하지 않는가. 화장실을 오가며 힐끗 본 아이는 다리가 아파 보이기도, 심심해 보이기도 한다.
해결사는 아이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앉은 한 승객이었다. 또래 자녀를 옆에 앉힌 아버지 승객은, 초면의 아이에게 손 장난감을 흔들며 보여주었다. 아이를 다루는 일상적 기술을 꼬마 승객에게 똑같이 선보인 것이다. 웃으며 눈을 마주치고 작게 “까꿍! 이게 뭘까? 가지고 놀아 볼래?” 말한 아저씨 덕에 아이는 울음을 뚝 그쳤다.
'왜 그래' 어머니는 입국 수속 줄에서도 신경질적으로 같은 말만 반복했다. 유모차 속 아이는 계속 울었다. 부모는 제 아이에게 '네가 원인'이라는 신호를 언어와 표정, 모든 수단을 이용해 전하는 중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여전히 남 일처럼 구는 아이 아버지이다. 도대체 저 가족은 왜 여행을 온 걸까. 수속 줄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나는 남편 귀에 ‘저건 아동학대야.’ 라고 속삭였다.
몰상식한 부모도 있다. 그런데 상황을 돕고 타개한 것 역시 다른 어떤 부모이다. 세상에는 상식과 예의가 다른 여러 개인이 있을 뿐이다. 문제적 개인이 부모가 될 때, 아이를 둘러싼 비행기, 나아가 그 세상이 불행해진다.
한국의 아기 동반 가족만이 억척스럽게 비행기를 타는 걸까. 선진국 아기들은 비행기를 타지도 울지도 않으며, 그들 부모들은 아이를 달래는 최고 스킬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어디라도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말 못 하거나 서툴기에 울 수밖에 없는 존재. 부모란 그런 존재와 함께 하기에 감사하고 미안하고 배우고 반성하며 성장하는 사람들. 아기가 사라진 세상이 아닌 이상, 공공장소란 미성숙에 대한 이해와 인내, 조력을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체험존이 아닐까. 아기도 부모도 주변인도 그 경험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나 역시 가까운 좌석에서 아기 승객을 만나는 것이 편안하지만은 않다. 울음소리는 그렇다 쳐도 아기와 부모 마음까지 신경 쓰여 더 그렇다. 그래도 나는 불편을 감수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좌석 틈으로 아기와 눈을 맞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줄 수 있다. 같은 비행기에 우는 아기가 안 타기를 바라는 것보다, 부디 예의와 상식을 갖춘 어른들이 타기를 바랄 뿐이다.
“아기가 고생하니 어릴 때는 집에 있으라.” 말하는 것은, 고생이라는 단어로 포장했지만 약자가 집 밖으로 나서길 주저케 하는 방해와 다르지 않다. “기억도 못할 어린아이를 데리고 왜 비행기 타는 여행을 하느냐”는 질문의 답은 김영하 작가의 말로 대신해 본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좋은 곳에 가는 걸 이렇게 말해요. ‘애들은 다 까먹을 텐데 왜 좋은 곳에 데리고 가냐.’ 그런데 거기에 대한 제일 좋은 답은, 좋은 감정은 남는다는 거죠. 부모와 함께 바다를 갔고 바다에 대한 좋은 감정은 남아서, 구체적으로 어떤 해수욕장인지 뭘 먹었는지 잊어버려도 나중에 바다에 가면 굉장히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 듯이. 어차피 책이라는 건 읽고 나면 70% 이상은 다 잊어버린대요. 그래도 그 책을 기분 좋게 봤다는 느낌만 남는 거죠.” (tvn '알쓸인잡'에서)
아이의 기억만 중요한 것도 아니다. 함께하는 어른에게 여행의 기억은 꼭 필요하다. 그것이 행복을 찾는 끈인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기회인지, 삶을 지탱하는 힘인지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분명한 건, 여행은 누구에게든 욕심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