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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리 Jul 22. 2023

지 새끼는 정말 지 눈에만 예쁜가

4D 그 이상의 예쁨을 발견하며

사진첩에 아이 사진만 가득하다. 오해 마시라. 내 새끼가 너무 예뻐서 그런 게 아니다. 달리 찍을 게 없을 뿐. 꾸미는 데 여유나 관심이 덜한 지 오래라 나 자신은 단독 피사체로 삼지 않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스크롤을 내리다 내 얼굴이 나오면 흠칫 놀란다. ‘잘못 찍힌 건가?’ 하며 덤덤히 삭제를 눌러도 아쉬움이 없다. 보정 앱을 켜지 않아도,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나와도, 초고화질 렌즈를 들이대도 상관없는, 모공 하나 없는 어린이가 가까이 있는데 뭐 하러 다른 것을 담겠는가. (물론 배경과 구도의 힘으로 나를 비사실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인생 샷 욕망은 언제나 가슴 한 구석에 있다.)


아이 사진을 남에게 보내지 않으려 나름 신경을 썼다. 하나뿐인 손주라 아무리 공유해도 과부하가 없는 조부모님 카톡방은 예외다. 비슷한 또래를 키우는 친구와 육아 상황을 얘기하다가 맥락에 맞는 사진을 서로 공유하는 정도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스킵할 권리를 주는 SNS에는 가끔 사진을 올렸다. 열 번의 마음을 누른 한 번이었다. 꼭 기록해두고 싶은 일화를 덤덤하게 또는 익살스럽게 남겼다. 팔불출처럼 보이지 않으려 했다. 물론 의도가 그렇다한들 자식 자랑처럼 안 보였으리란 보장은 없다. 하루 중 만나는 사람이라곤 말 못 하는 아기와 저녁에 잠깐 보는 남편뿐이던 휴직기, 복직해서도 온종일 어린이집의 꼬마가 눈에 밟혔던 영유아기. 이 시기의 누구나 그렇듯 삶에서 육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기에, 근황을 얘기하는 데 있어 아기 사진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로 변명해 본다.


편하게 하면 되지 왜 이렇게 의식하느냐 하면, 나 역시 남의 아이 사진과 일상을 가깝게 보는 피로감을 느껴봤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지 새끼, 지만 이쁘지.’ 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다른 아이들 사진을 볼 때 귀엽고 예쁘다 생각하지만, 벅차오르게 깨물어주고 싶다거나 일간, 주간으로 보고 싶은 정도는 아니니 말이다.




그럼 정말 지 새끼는 지 눈에만 예쁜 걸까.


친구의 아이가 어린 아기이던 시절을 떠올려 본다. 아기란 자체로 귀엽지만 내가 좋아하는 친구의 자식이라 좀 더 정이 갔다. 여기까지는 상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다. 그런데 직접 만나 시간을 보내니 또 다른 전개가 펼쳐졌다.


사진에서 커 보였던 아기가 실제로는 도토리만 했다. 눈이 좀 작아 보였는데 만나보니 또랑또랑 큰 눈인데다 순식간에 초승달로 바뀐다. 직접 듣는 옹알이 소리는 글자로 표현이 안된다. 요정의 가냘픔이 아니라 동물의 울음 같은 것이 그대로 우습고 깜찍했다. 압권은 안았을 때의 말랑한 무게감과 특유의 냄새였다. 잠든 곁에서 나는 분유향, 로션향 같은 것들. 그 날 이후로는 사진을 볼 때마다 내 새끼가 아닌데도 참 예뻐 한참을 보았다.


그래서 2D의 사진만으로는 4D의 현실을 그대로 느낄 수 없음을 알았다. 살아 움직이며 소리 내고 향을 풍기는 어린 인간이라 더 그렇다. 남의 자식도 이리 느껴질진대 24시간 붙어지내는 내 자식은 어떻겠는가. 평평한 단 한 컷만으로 모든 경험적 감각이 동시에 작동한다. 표정으로 앞뒤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있지도 않은 소리가 자동 재생된다. 향기와 살결, 꼬물락댐이 어떤지 안다. 그러니 미소지음의 이유가 단순히 유전자의 끌림이라고만 설명하기엔 모자라다.


이를 모르는 다른 사람으로서는 참 곤란하다. 아이를 놓고 함부로 어른 기준에서의 외모 평가를 할 일은 아니기에 예의상 공감을 표한다. 넘을 수 없는 이해의 강에 두 사람이 마주 서 있다. 한쪽의 눈은 하트로 변해 있고, 다른 한쪽은 ‘그렇게까지 예쁘진 않은데… 역시 내 새끼가 아니라 그런가 보다.’ 생각한다.




잘 모르는 입장일 때가 또 있었다. 강아지나 고양이의 예쁨에 대해서 말이다. 어린 모습을 귀엽다 느끼기는 해도 애초에 동물 자체를 무서워하는지라 푹 빠져들기에 한계가 있다. 어느 날, 강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내 말에 지인이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강아지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 없어.”


이 말이 ‘강아지를 싫어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라는 명제를 성립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쩐지 그렇게 들려 애꿎은 마음이 들었다.


발바닥 냄새를 맡아본 이들만 알 수 있다는 행복한 비명에 공감할 수 없었다. 내 지인은 길렀던 강아지들과의 기쁜 교감이 코와 귀와 피부로 온전히 기억되었을 것이다. 다만 내게 그런 경험이 없을 뿐이다. 그 차이가 만들어 내는 차이. 여기에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잠깐의 대화로 우리 둘은 영 다른 행성에 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아기들은 다 예쁘다’고 했을 때, 회사 선배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에이, 솔직히 못생긴 애기들 많잖아. 왜 그래.”


다시 말하지만 나는 전형적인 미의 기준 따위를 말한 것이 아니었다. 내 새끼여서도 외모가 빼어나서도 아니고 그 자체로 독창적인 존재라서 아기들은 다 예쁘다. 평면의 2D 또는 스쳐 지나간 3D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기억과 경험의 일부만으로 뿜어져 나오는 사랑스러움. 그것이 4D의 예쁨이란 말이다. 나아가 모든 이의 아름다움 역시 그러하리라. 나태주 시인의 <풀꽃> 시 구절처럼.




내 새끼가 내 눈에만 예쁠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모르는 마음, 싫은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니 사진 자랑은 오늘도 한번 꾸욱 참았다.


대신 그 마음 그대로, 다른 예쁨을 볼 시간을 기대한다. 다른 자식의 예쁨을 잘 몰랐지만 어느 순간 스며들었었다. 강아지의 예쁨을 잘 모르지만 더 잘 알게 될 날을 기다린다. 그러니 평면의 사진만으로 다른 기억과 경험을 마주할 시간이 또 올 것이다. 언젠가 나를 두드릴 새로움이, 벌써부터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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