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밤까지 너와 나의 이야기
등교를 준비하는 아침은 늘 부산스럽다.
<나 홀로 집에> 영화 속 집을 나서는 대가족의 엄마라도 된 듯, 학교 가방에 물병과 준비물을 넣었는지 확인하고 장화를 신긴 후 우산을 챙겨 허겁지겁 현관문을 밀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 직전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돌아보니 아이의 표정이 이상했다. 속이 메슥거리는 느낌이 든단다. 잠시 머뭇거리다 그럼 좀 쉬어 가자며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담임 선생님께 하이톡으로 사정을 설명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괜찮아지면 늦게라도 보내겠다고 말씀드렸다. 힘차게 시동을 걸었던 엔진이 푸시식 소리를 내며 멈췄다.
사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지난주에는 이 시간쯤 목이 아프다는 아이를 놓고 “그럼 오늘 학교 가지 말자!” 시원하게 외쳤던 나였다. 하지만 오늘 내게는 스터디 모임 일정이 있다. 맡은 부분을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해 온 일주일이 허무하게 스쳤다. 창백해 보이는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면서도 자꾸만 시선은 벽시계를 향했다. 돈 벌러 회사를 가는 것도 아닌데 나를 더 생각하는 모습에 죄책감이 든다.
좋아하는 영상을 틀고 까르르 웃는, 사뭇 멀쩡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 여러 감정이 스친다. 참지 못하고 혹시 꾀병이 아니냐는 질문마저 입에 올리고 말았다. 이렇다 표현하기 어려운 속상함에 자꾸만 표정이 굳는다. 이런 엄마의 마음을 예민하고 섬세한 아이가 모를 리 없다.
“엄마, 있잖아. 내가 조금 괜찮아지면 2교시나 3교시쯤에 갈게.”
오후에는 동네 도서관 수업이 있었다. 끝나고 방글방글 문을 열고 나온 아이는 선생님께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더니 말 끝에 자칫 무례하게 들리는 농담을 덧붙였다. (물론 심한 말은 전혀 아니다.) 나른하게 기다리던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를 가까이 데려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방금 한 말은 잘못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입장을 바꿔서 듣는다면 너무 속상할 말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다시 가서 제대로 인사하고 오라고 했다.
아이는 그렁그렁한 눈과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쭈뼛거리다 다음 수업을 준비하시는 선생님 근처를 조금 배회하다 돌아왔다. 먼발치에서 이 정도면 되었냐는 듯 엄마의 눈치를 보는 아이를 보며 나는 잠깐 호랑이가 된 기분이었다. 불편한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인사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긴 했기에 적당히 상황을 종료했다.
일주일 중 가장 바쁜 요일인 오늘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만들기 수업도 있는 날이었다. 골판지로 만든 3D 미로판에 구슬을 넣고 노는 작품을 손에 든 아이는 토끼처럼 폴짝댔다. 이따 할머니와 고모를 만나 보여드리고 같이 놀 거라며 미로판 입구에 크게 쓰인 '오만 원' 글씨를 자랑스럽게 가리킨다. 오만 원을 내야지만 이 게임을 할 수 있단다. 앗, 갑자기 또 머리가 아파진다.
"너는 이걸 같이 놀려고 만든 거야? 아님 돈을 벌려고 만든 거야?"
아이는 난처한 표정으로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둘 다'라고 대답한다. 이 작품이 놀이공원이라 그런 거란다. 가족이나 친구랑 놀기 위해서는 돈을 받는 게 아니라고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여덟 살 눈에 원망과 억울함이 서렸지만 꾹 눌러 참는 것이 느껴진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더니 다시 방법을 찾는다.
"엄마,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그럼 처음 시작할 때만 500원을 내는 거야. 어때?"
"음, 그것도 안 돼."
고단함이 저물 시간이다. 덥고 습한 날씨에 모기장까지 설치하니 아이의 작은 침대가 더 좁게 느껴졌다. 그동안은 몸을 욱여넣고 선풍기 바람을 세게 틀어서라도 잠이 들 때까지 곁에 누워 기다려 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참에 혼자 잠드는 연습을 해 보자고 말했다. 엄마가 침대 아래쪽 바닥에 누워 있겠다고, 잠들기 전까지 나누는 대화는 똑같이 할 수 있다고 달래주었다. 잠들려 노력하던 아이는 꽤 오랜 시간을 뒤척였다. 몇 번의 울먹임이 있었지만 나는 평소보다 메마르게 달래주고 목석처럼 누워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잠든 아이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 아닌 모두가 잠든 밤. 불 꺼진 거실 소파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긴다. 돌이켜보자니 오늘은 종일 얼굴을 굳힌 기억뿐이다. 천둥만큼 혼낸 일은 없지만 얼음처럼 여러 번 정색했다. 아이가 크게 잘못한 일이 있던 것도 아니다. 이상하게 내 속이 옹색하고 치졸하다. 눅진한 장마를 탓해 보기도, 호르몬을 타박해 보기도 한다. 꽉 들어 찬 갑갑함을 천천히 꺼내본다. 이유 모를 긴장을 풀고 보니 오늘의 일들이 다른 눈으로 보인다.
몇 주 전 교실에서 탄 냄새가 난 적이 있다고 했다. 담임 선생님 컴퓨터 부품에 문제가 생겨서 그랬다 한다. 아이들끼리 혹시 불나는 것 아니냐며 웅성댄 것이 자꾸 생각나 무섭다 할 때만 해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며칠 후 화재경보기 오작동으로 다급한 대피방송이 한참 동안 흘러나왔고, 놀란 아이는 교실 구석으로 가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아이의 불안이 증폭됐다. 며칠 후 한번 더 경보기가 오작동했고 전체 점검을 하느라 5교시 내내 불규칙적인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렇게 재미있을 줄 알았으면 유치원에 다니지 말고 바로 초등학교에 입학할 걸 그랬다.'던 아이는 본격적으로 학교 가기를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발걸음 가뿐하던 등굣길을 180도 변하게 만든 사건들이 나는 몹시도 원망스러웠다. 감정을 충분히 이해해 주면서도 실은 별일이 아니라고 말해줘야 했다. 걱정이나 불과 관련된 다양한 책을 찾아 읽어주고 함께 걱정인형에게 당부의 말도 전했다.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실제 불났을 때와의 차이를 알려주고 학교에서도 교내 안내 방송을 적극적으로 해 주시기로 하셨다.
급하게 쏟아붓는 약이라 하여 모두 즉효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 인간을 키운다는 것은 여태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처럼, 오래 품고 안고 견뎌주는 것. 어제의 노력은 없었던 양 오늘도 0에서부터 똑같은 말을 해 주는 것.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주 천천히 달라지는 것. 나는 그저 이 또한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을 뿐이다.
얼마 전 목이 아프다 하여 학교를 가지 못한 날, 한참이나 입과 목 안을 들여다본 의사 선생님께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무 이상이 없다셨다. 그제야 아이의 불안이 모호한 아픔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오늘 문 앞에서 메슥거렸던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을지 모른다. 이 마음을 아는 이상, 엄마인 나는 좀 더 편안한 표정을 지었어야 한다. 반복해 전하는 안심과 응원의 말이 지치고 힘들어도, 그것이 나의 계획과 기대에 반하는 것이라도.
도서관에서의 일은 바르게 알려주었어야 했음이 맞다. 다만 삐딱하지 않은 채 과거로 돌아간다면 아이의 마음을 좀 더 알아줄 수 있었을지 모른다. 평소 행동과 성격을 생각해 보면 아마 수업 후 기분이 좋아 자기 딴은 친함의 표시로 농담을 덧붙였을 것이다. 따라서 옳음과 옳지 않음을 짚어준 후에 본의를 한 번쯤 인정해 주고 끝냈으면 되었지 않나 싶다. 그때 나는 속에 들어찬 분노를 꾹 누른 후, 점잖게 훈육했다고 스스로 안도했다.
만들기 수업 작품에 대해서는 확실히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중에 보니 네모 상자에는 커다랗게 ‘유령의 집’이라 적혀 있었다. 아이 말대로 놀이동산 입장료의 개념으로, 입구 쪽에 가격이 적힌 것이다. 같이 노는 과정에서 실제 돈이 아닌 방식으로 하자고 제안했어도 충분했을 일이다. 나는 놀이를 이끄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의 걸음을 뒤에서 따라가기만 해도 되었다. 오만 원을 적었다 하여 진짜 오만 원을 받아야 할 만큼 어린이는 융통성 없지 않다. 깐깐한 것은 오히려 내가 아닌가. 방금 완성한 작품이 자랑스럽고, 같이 가지고 놀 생각에 들떠 나온 이에게 갑자기 옳고 그름을 따지며 찬물을 끼얹은 사람이 바로 나다.
좀 전의 밤도 마찬가지다. 살의 온기가 맞닿는 굿나잇 인사를 제대로 나누지도 않았다. 더위와 습기, 모기장 지퍼가 잘 닫히지 않는 것에 대한 짜증만 풀풀 풍기며 서둘러 잠자리를 맞았다. 아이의 울먹임에도 슬기롭게 답하지 못했다. 울다가 내복 바지를 안 입어서 선풍기 바람이 춥다는 짜증에,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그러게 왜 아까 엄마가 입으라고 할 때 안 입었냐.’를 말하고야 말았다. 아이 앞에서 참 아이처럼 굴었다.
어디 오늘 하루만인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도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고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이 바로 아이 앞에 선 어른이 아니던가. ‘나 정도면 괜찮은 엄마지.’와 ‘난 정말 못돼먹었어.’ 사이를 하루에도 수백 번 오가는 것이 육아의 달고 쓴 맛이다. 서둘러 반성하고도 내일 다시 ‘이것조차 받아주지 않는 엄마’가 되기란 참 쉽다.
올해 초까지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에서는 가정에서 함께 대화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감정 코칭 자료를 많이 주셨다. 그중 인상 깊었던 것은 '화 잘 내기'에 대한 것이었다. 화내기는 꼭 필요한 감정 표현이며,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잘 내는 방법이라고 했다.
나는 완벽하지 않고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다. 게다가 정해진 일이 틀어졌을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성격이다. 따라서 깨달음과 각고의 노력이 있다 한들 화내는 내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다스리고 잘 표현할지는 계속해서 알고 노력하려 한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기 위해서다.
그러려면 이 밤도 꾸깃대는 생각은 접고 얼른 자야 한다. 잘 자고 체력을 키우자. 그것이 나의, 내 마음의 못남을 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