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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리 Sep 02. 2023

너는 나의 거울 (1)

과거의 나, 타고난 나를 비추는

아이 기질을 대하는 고단함에 대해 지인에게 가볍게 투덜거린 적이 있다. 기저귀 떼는 과정이 생각 이상으로 지난하다거나 새로운 시작 전엔 충분한 설명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 따위였으리라. 듣고 있던 지인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 봐. 그런 것들이 다 어디서 왔겠어? 결국 너나 남편이지."


잘 모르는 소리 하네. 우리 엄마가 말하길 나는 이렇게까지 안 자고 안 먹지 않았댔다. 주저 없이 달려드는 성격은 아니더라도 신중한 관찰과는 거리가 멀었다. 난 아니니 남편의 특성이라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 볼까. 그도 아니라면 조상의 DNA 어딘가에 있다고 적당히 여겨보려던 참이었다. 그때 얼핏 서늘한 기시감이 살끝에 닿았다.




모든 어린이는 칭찬을 먹고 자란다. 할 수만 있다면 듬뿍 더 듬뿍 주고 싶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칭찬받아 마땅할 거리를 보여주거나 말할 때면 끝났을 때 절대 시끄럽게 손뼉 치지 말라 신신당부한 뒤 시작한다. 상장을 들고 왔기에 축하 인사를 건네면 무심히 딴청을 피운다. 남편이 자기라면 기분 좋게 누릴 것 같은데 왜 그러는지 신기하다 할 때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말했다.


"내가 그랬어. 윤이랑 똑같았어.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의 나는 쓱 끝내놓고 척 내놓는 것에 익숙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과정 없이 완성된 성과만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어떤 분야는 원래 잘한다, 믿는다'와 같은 인정을 얻은 느낌만으로 만족했다. 소란스러운 칭찬은 오히려 묵직한 인정의 반대처럼 느끼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해석해 보려 노력 중이지만 여전히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땐 그랬다. 왠지 그랬다.


"그렇다고 칭찬을 싫어하는 건 아니야. 야단스럽게 굴거나 주목받는 게 부끄럽고 부담스러운 것뿐이야. 적당히 인정해 주고 관심과 신뢰가 있다는 것만 느끼게 하면 될 거야."


과거의 내가 현재의 아이를 변호한다. 남편은 여전히 헷갈리는 얼굴이다.




길 가다 만난 친구에게 인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아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꼬마 친구들의 알은체와 다른 온도의 데면데면함에, 옆에 선 엄마인 나는 몹시 미안하고 당혹스럽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반사적으로 빠르게 같이 인사해 주거나 자연스레 아이 팔을 잡아 올린다. 주변의 엄마들에게 들어보니 유별난 일은 아니랬다. 길에서 인사 안 하는 애들이 교실 가면 같이 잘 논단다. 안심하면서도 '이름 한번 부르는 게 대체 뭐가 어렵나.' 싶어 여전히 불만스럽다. 그렇게 걸음을 내딛는데 불현듯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평소 채팅이나 문자로 잘 얘기 나누다 직접 마주쳤을 때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내 모습. '너는 왜 인사를 안 하냐'던 친구들의 말. 사춘기 때 이성인 친구들과의 관계였던지라 초등학교 1학년생과 정확히 비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그 이중적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싫은 건 아니지만 (오히려 좋기까지 하지만) 부끄러워 피하고 싶던 마음이 갑자기 선명한 선과 면과 색으로 그려진다. 인사는 둘째치고 부끄러움이라는 감정만 놓고 보면 나의 유년기는 발표시간의 모기소리와 줄 끝에 서기로 채워져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은 남편도 “생각해 보니 나도 저랬어.” 라 말할 때가 있다. 그런 기억은 희한하게도 처음부터 불쑥 솟아나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몇십 년 전의 내가 페이드 인 효과로 겹쳐 보이는 것이다. 타임캡슐을 열듯이 나의 일부의 일부의 일부가 가물가물히 재현되고야 만다.


그 장면으로 지금의 아이를 한발 더 이해한다. 기질적 특성에 대한 현재의 염려가 별 게 아니라는 안도감, 도리어 그것이 특별한 양분이 되어 자라줄 것이라는 믿음까지 더해진다.



나의 가장 큰 걱정이고 생각이고
마음 속 저 깊이 떨어져 비추는 거울이고
그림자이고 메아리이고 발끝 손끝이고
사랑하는 것 이상의 사랑인 것

(2019.8.14 - 4세와 함께하던 어느 날 기록)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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