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나, 말하는 나를 비추는
(앞의 글에서 이어집니다.)
아이를 이해하도록 돕던 거울은 때때로 현재의 나를 비춘다.
"윤아, 이건 이렇게 저렇게 하면 돼."
"미안."
"응? 미안할 게 아니라 엄마가 그냥 알려주는 거야."
"아 맞다. 미안."
왜 그럴까. ‘알았어' 정도로 지나갈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는 말이 자꾸 붙는다. 건성으로 대답한 것 같긴 하지만 방어적이고 소극적으로 보여 마음이 편치 않다. 같은 말을 한번 더 내뱉은 아이는 지적받을세라 급히 덧붙인다.
"방금 한 말은 잘못 말한 나한테 미안하다는 뜻이야!"
솔직하고 예의 바른 두 글자 감정 표현이 갑자기 거슬리는 말이 되었다. 인지하고 나니 같은 거슬림이 금방 귀에 꽂힌다. 무언가를 하던 중 아이가 상세한 요구를 더해올 때, "어, 알겠어, 미안." 이라며 정신없이 대꾸하는 내 입. 내 물건을 내가 떨어뜨리고도 놀라서 하는 말.
나야말로 입버릇처럼 썼던 것이다. 추임새 수준으로 가볍게, 단 한 번도 의식하지 못한 채. 아이는 정확하게 ‘알았어‘나 ’아하‘, ‘아차’를 대체하는 말 정도로 나를 따라 했을 것이다. 가르친 지도 모르게 가르치고 있었다.
“엄마는 왜 자꾸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떤 줄 알겠다'는 말을 해?"
내가 그랬다고? 입가에 뾰루지가 났을 때 "누가 보면 다친 줄 알겠어.", 장바구니를 들고 도서관에 갈 때 "다른 사람이 보면 마트 가는 줄 알겠네.", 하다못해 아이의 '미안' 추임새에조차 '자꾸 그렇게 말하면 엄마가 혼낸 것 같잖아.' 하던 목소리가 가물가물 들려온다.
변명하자면 '~처럼 보인다'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런데 뉘앙스가 다르다. 대상 자체의 특성보다 응시하는 제삼의 눈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그 시선을 의식하는 표현이니까. 나와 가족보다 불특정한 타인의 생각을 앞서 생각하니까. 아이 덕에 별 희한한 말 습관을 알게 된다. 따라 하지 않고 먼저 물어주어 얼마나 다행인가.
"이번 주부터 장마래. 오늘 비 많이 오나 봐. 무섭다~"
비 소식에 대한 호들갑이라 해 두자. 맥락, 표정 같은 비언어적인 것들이 있어 오해를 살 줄 몰랐던 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붙인 부정어.
순간 잡고 있던 아이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학교에 불이 날까 봐 무섭고 이것도 저것도 무섭다던 말이 뒤늦게 떠오른다. 요즘 왜 겁이 많아졌는지 툴툴거렸는데 이번에도 내가 일조했나보다.
며칠 뒤 교문 앞에서 1교시 발표가 무섭다며 주눅 든 아이. 공감과 격려 이후 이 말을 덧붙였다.
"이건 무서운 게 아니라 떨리는 거야. 긴장해서 그런 거야. 지나가면 바로 괜찮아지는 거야."
사전적으로는 무서움에 포함되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세밀한 감정을 좀 더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했다. 긴장감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계속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금방 지나가는 일상의 일부임을. 너를 해치지 않을 것임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임을.
모든 것이 내 잘못, 부모의 잘못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아이가 대담한 성격이라면 별 상관없는 일이었을 수 있다. 그런데 마침 기질적으로 섬세하고 언어적으로 예리하다. 그래서 더 정확한 언어를 쓰고 알려주는 것이 좋겠다. 이참에 내 습관도 알고 개선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이제부터라도 엄마의 말들이 아이를 헷갈리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부모만의 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평소 듣도 보도 못했던 별 이상한 표현을 어디선가 배워와 쓰지 않는가. 딱히 나쁜 말도 아니지만 좋은 느낌도 아닌 말을 쓸 때면, 민망함에 부디 선생님께서 '집에서 부모가 저렇게 말하나 보네.'라고 단정 짓지 말아 주시기를 소망한다.
며칠 전에는 가끔 “으디이 보자아~(어디 보자)"하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남편의 타령조가 여덟살 입에서 무심히 나오는 걸 들었다. 나는 배를 잡고 한참이나 웃었다. 애가 똑같이 따라 하고 있다고 전해준 날 저녁에도 아이는 90년대 유행 랩 소절을 덤덤하게 흥얼거렸다. 어처구니없이 귀여운 앵무새다.
아이에게 현재의 내가 투영되는 경험을 자꾸만 하니 퍽 책임감이 든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좀 더 단정한 태도와 다정한 말씨를 품어야지.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고,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의 거울이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