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탈리 May 04. 2023

걱정인이 걱정하는 법

첫 글자 기역을 주의하자

남편과 마주한 식사 시간.


“면이 질긴데 괜찮아? 아팠던 턱 다시 아플까 봐.”

문제가 없단다. 진지한 나와 달리 그는 ‘아, 그런 적이 있었지.’ 하는 정도다.


“전에 팟캐스트 들으면서 대교 건너다가 다른 방향으로 간 적 있잖아. 이따 운전도 조심해."

고개를 끄덕이는 남편. 이내 웃으며 말한다.

“너는 정말 다양한 주제로 걱정을 하는 것 같아.”


“그러네. 오죽하면 윤이도 맨날 나보고 책에 나오는 ‘걱정양’이라잖아. 애한테까지 그렇게 보이면 안되는데.”

끝에 ‘걱정이야’를 붙이려다 간신히 멈췄다.


“이제는 엄마가 걱정하는 것에 대해 애가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네.”

놀릴 거리를 찾은 남편이 신나게 코 평수를 넓힌다. 최단시간 쓰리콤보 기록이라나.     




여덟 살 아이는 제 속도에 맞게 스스로 잘 크는 중이다. 잘 하는 것, 칭찬할 것만 꼽자하면 부모 마음에 백 가지도 넘게 쓸 수 있다. 그런데 내 눈에 뭔가 쓰이기라도 한걸까. 걱정거리가 자꾸만 앞서 보인다. 씨앗들을 한가득 품고 있다가 단 한 방울의 물이라도 튀면 기다렸다는 듯 흙 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설령 그 물방울이 칭찬의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입학 후 처음 맞는 학부모 상담일. 선생님께서는 아직 한 달 남짓한 시간밖에 보내지 않아 말씀드릴 것이 그리 많지 않다며, 다만 “윤이 같은 아이라면 키우기 편하셨을 것 같다.” 라고 하셨다. 독서 습관이 잡힌 바른생활 어린이라는 것. 어릴 적부터 규칙을 잘 지키고 성실한 아이의 장점을 나는 당연히 잘 안다. 학교가 유치원보다 훨씬 재미있다며 즐거워하는 날들이라 새로운 가르침 앞에 늘 초롱초롱한 얼굴이었으리라. 끝 모를 질문과 제안으로 오만 어른들을 들들 볶지만 그것은 호기심 많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기꺼이 감내할 일이다.


선생님의 말씀이 얼마나 안심되고 감사한 것인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이럴 때 꼭 쓸모없는 생각의 실행 버튼을 누른다.

‘그럼 거칠고 활달하게 노는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되지 않을까?’


‘남자 아이라면’ 따위의 말은 몸서리치게 싫다. 그래 놓고 막상 나는 남아의 전형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손쉽게 잣대 삼는다. 좀 더 부대끼고 덤벼들며 놀아야 친구를 잘 사귀고 어울려 놀 수 있지 않나. 관찰에 시간이 드는 성격이 친구 관계나 자존감에 문제가 되지는 않는건가.


모두가 괜찮다는데 유독 내게만 이상한 필터가 들어 앉았다. 몸싸움이 싫어 공이 발 앞에 와도 피하는 축구 경기의 장면, 못한다고 주눅 들어 아예 내려놓는 줄넘기 연습 장면이 아른거린다. 못 타는 미끄럼틀 앞에서 대체 왜 다른 아이들처럼 달려들지 않냐고 재촉하게 된다.




놀이터에서 아이와 노닥대며 그네를 밀어주던 그 날도 그랬다. 비어 있던 옆자리에 또래의 다른 아이가 달려와 선 자세로 올라탔다. 옆 그네는 순식간에 하늘을 날 기세로 움직였다. 자신감 넘치는 몸짓에 한참이나 눈이 갔다. 그 때 마침 더 세게 밀어달라며 항의하듯 들리는 바로 앞의 목소리. 순간 속에서 참지 못할 무언가가 탁 켜진다.


“시작부터 노력하지 않고 밀어달라고 하는 건 안 돼. 여덟 살인데 언제까지 스스로 안 하고 엄마한테 해 달라고 할 거야? 연습 해 봐. 연습하면 너도 혼자 탈 수 있어.”


우리는 바로 직전까지 함께 웃으며 바람을 즐기던 중이었다. 그러다 한순간에 굳어진 표정과 짜증 섞인 말투. 아이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할까.


“엄마, 나는 지금 연습을 하려는 게 아니라 신나게 그네를 타려는 건데.


아이가 울먹인다. 나도 이런 내가 싫다. 고작 그네 타는 것 가지고. 치사하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다짐한다. 불씨가 비집고 나올 때마다 꾹꾹 눌러야지. 다른 아이를 통해 우리 아이의 강점을 가려 보지 말아야지. 걱정과 불안을 핑계로 상처주지 말아야지. 하다못해 걱정을 걱정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기술이라도 연마해야겠다. 아직 연습중이며 자주 실패하고 있지만 말이다.


부모가 할 첫 번째는 아이의 미숙함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라 한다. 그것은 내가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이다. 아이는 항상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잘하고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익어 나간다. 늦어도 괜찮다. 믿어도 된다.



아파서 이틀만에 등교한 날 밤.


“엄마, 나는 오늘 교실에 들어갈 때 너무 무서웠어.”

“뭐가 그렇게 무서웠어?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선생님이 나를 보자마자 그럴까봐 무서웠어. 첫 글자는 기역이야.

“기역? 뭐지?”


아이가 장난스럽게 귀에 대고 속삭인다.

“걱-정-”


정신 바짝 차리자. 엄마의 영향력이 오늘도 이렇게 의외의 곳에서 발견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