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학습
(그림 : 최민식이 Leonardo.ai로 그리다)
탐구자 : '놀이 자체를 논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철학자 : 가다머는 ‘놀이함’의 근원적 의미는 ‘중간태적 의미’라고 강조합니다. 중간태란 한국어는 물론 영어에도 없는 언어적 형태인데, 능동과 수동의 중간적 형태의 동사, 곧 재귀동사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있는 겁니다.
탐구자 :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지거든요. 뭔가 재귀동사를 설명하는 듯해서 기대를 했는데, 설명이 더 어려워지고 있어요.
철학자 : 인정합니다. 이렇게 설명해 보죠. 여기서 핵심은 ‘자체’입니다. 영어로는 itself라고 할 수 있을까요? 라틴어로는 'per se'입니다. 위에서 원시 부족들은 삶 자체가 곧 놀이 그 자체입니다. ‘자체’로 모든 것이 모아지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자기’ 즉 셀프의 개념입니다.
탐구자 : 그러면 요즘 자녀들이 공부를 놀이와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시죠. 공부를 놀이하듯이 하라고 하면, 그건 너무 어려운 것이잖아요?
철학자 : 공부 그 자체를 하는 법을 배워나가야 되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는 공부가 스스로 하는 것이 되어야지, 부모가 시켜서 하는 공부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본인이 스스로 공부를 하는 것이야말로 존재 자체가 참여하는 공부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학생은 공부 그 자체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공부를 놀이하듯이 한다는 의미를 터득해 가기 시작할 겁니다. 공부라는 것은 잘 노는 것입니다. 독서를 취미로 하는 사람은 독서를 하면서 잘 노는 것이죠.
탐구자 : 놀이라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철학자 : 놀이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그 놀이 자체로 들어가지 못하고 존재 자체가 그 놀이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왜 공부를 못하느냐? 공부를 할 때, 지식을 소유하기 위해 하기 때문에 존재와 괴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공부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지식을 얼마나 소유하느냐가 남과 경쟁하는 데에 유리하기 때문에 친구관계도 존재와 괴리가 생기고 공부도 마찬가지로 존재와 괴리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삶은 고통을 누적시켜 갈 뿐 기쁨이 없는 삶이 됩니다.
탐구자 : 그렇지만 그게 오늘날 현실 아니겠습니까?
철학자 : 현실이 그러해도 나는 달라야 합니다. 그래야 ‘나’가 되는 겁니다. 사람은 놀이를 통해 타자성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 타자성을 내 삶의 큰 에너지원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식을 소유하는 공부를 하기보다 공부라는 타자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는 나대로 발달해 가고 공부는 공부대로 발전해 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도 즐겁고 공부도 즐거운 겁니다. 이에 대해 가다머는 이렇게 말합니다. “놀이하는 고양이가 털뭉치를 선택하는 것은 이 털뭉치가 함께 놀이를 하기 때문이다. 공놀이의 지속성은 예기치 않은 것을 저절로 야기하는 공의 자유로운 온갖 운동성에 근거한다.”([진리와 방법],196)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쇼팽콩쿠르 1등 한 후, 소감을 묻는 질문에 답하면서, “어느 순간 내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하고 놀고 있더라. 나는 손가락이 놀이하는 것을 보면서 즐겼을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조성진은 피아노를 두고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했다기보다 함께 잘 놀았는데 그 결과 1등이 된 것입니다.
탐구자 : 입시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공부하라고 하면 화를 낼 것 같습니다. 당장 눈앞에 대학이 걸려있는데, 즐기면서 공부하라, 공부 자체를 하라, 놀이로 공부하라 하는 말을 들으면 자신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로 들을 것 같습니다. 이게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입니다. 또 다른 현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입시가 끝나는 순간 학교에서 배운 지식도 멈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고 3 때 영어실력이 일생 중 최고의 실력이라는 말도 있죠
철학자 : 그게 바로 학생들이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위해 공부 그 자체를 하지 못하고, 경쟁을 위해 지식을 소유하는 형태로 공부했다는 증거입니다. 공부라는 것은 평생 하는 것인데, 학교 다닐 때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은 지식 소유 개념을 못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공부는 내 존재를 따라다니면서, 마치 가다머가 말하는 고양이의 털뭉치처럼 공부 자체가 내 존재와 함께 놀이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스스로 발달해 가면서 자기의 발달과 성숙을 이끌려고 애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놀이 자체의 신성함, 공부 자체의 신성함, 존재 자체의 신성함이 그 자체성 안에서 모두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원시부족이 존재 자체와 놀이 자체, 그리고 제식 자체가 만나게 되면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에 가까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그 모든 것을 신성함으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탐구자 : 옳은 말씀을 하시는 것은 틀림이 없는데, 너무 현실과 먼 말씀을 하고 계시는 듯합니다.
분석가 :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책 읽는 분들이 주변에 있으면 잘 관찰해 보십시오. 그런 분들은 때로는 어떤 목적을 두고 공부하기도 하지만, 목적 없이 공부 그 자체를 하고, 독서 그 자체를 함으로써 얻는 유익을 알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노년이 되면서, 급격하게 '아이'가 되는 사람들은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성장과 성숙을 아는 사람은 이러한 놀이를 통해 나이가 들어갈수록 지혜자가 되어 가는 겁니다.
탐구자 : 놀이와 자위행위, 이 두 주제는 너무 안 어울리는 게 아닌가요?
분석가 : 위니캇은 이 두 행위를 통해 여러 가지 관점을 비교합니다. 먼저 이 둘의 공통점을 보면, 둘 다 나름대로 만족감을 준다는 점입니다.
탐구자 : 유아의 자위라는 것이 좀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분석가 : 물론 지금 놀이를 주제로 다룬다고 할 때, 그 대상이 되는 아이의 시기는 이미 유아는 아닙니다. 최소한 3세 이상은 되겠지요. 어른들의 관점에서 보면 아이가 무슨 자위를 하느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아이의 자위개념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그런 자위와는 다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청소년 이후의 자위는 성기 중심적으로 사정이나 오르가슴을 느끼는 것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유아나 아동의 자위는 보다 더 낮은 수준에서 더 광범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아의 자위 개념은 유아가 신체적으로 발달해 가면서 자신의 신체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일반 아동들도 3세부터 성행동이 시작되면서 5세 경에 정점을 이루다가 차츰 감소되는 양상을 나타냅니다. 아동의 자위는 자신의 신체나 생식기를 보여주는 행위, 옷 위로 또는 옷 속으로 손으로 성기를 만지는 행동, 엎드려서 성기를 문지르는 행위 등의 형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위니캇에 의하면 어머니로부터 공감적인 품을 제공받지 못한 아이가 원초적인 모성관계 결핍으로 인해 그런 성행동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탐구자 : 위니캇이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대조하는 목적이 뭘까요?
분석가 : 위니캇이 놀이와 자위행위를 대조하는 것은, ‘자기’의 욕망과 ‘본능’의 욕구를 대비시키고자 하는 데에 일차적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자위는 본능(id)적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행위이죠. 만일 아동이 자위하는 것을 발달을 위한 통과의례처럼 겪고 지나가는 것으로 그친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만일 습관으로 굳어져서 반복적으로 행하는 자위가 된다면, 그것은 모성관계의 결핍을 순간순간 충족시키고자 하는 ‘충동의 문제’로 남게 됩니다.
철학자 : 놀이는 자아(ego)의 욕구를 충족시켜 줍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자기’의 욕망에 반응하게 됩니다. 즉 놀이를 통해서 자아가 맞닿아 있는 현실감각을 높이게 되면서 세상과 창조적인 관계를 만들어 내게 되면서, 동시에 내면적으로는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게 됩니다. 놀이는 외부세계를 사실적으로 접근한다거나 구체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그리고 허구적으로 접근을 하게 됩니다.
분석가 : 위니캇이 자위와 놀이를 대비한 이유는, 아이가 놀이를 잘하는 중에 본능이 개입된 육체적 흥분이 명백해지면 놀이를 멈추거나 놀이를 망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 때문입니다. 위니캇은, 아이가 아이답게 놀지 못하면 본능의 욕구에 쉽게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반대로 본능적 욕구에 쉽게 사로잡히는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좋은 놀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본능적 욕구에 쉽게 사로잡히는 사람은 성인이 되어도 자신이 처한 주변 상황들, 주변 사람들, 사물들조차도 모두 성적으로만 보려는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철학자 : 반면에 가다머가 언급했듯이, 놀이는 ‘자기’와 닿아 있어서 ‘자기’가 환경의 요구에 빠르게 적응하느라 충분하게 자신의 신체의 상태를 누리지 못해서 놓친 어린 시절의 생체 시간을 찾아줍니다.
분석가 : 그렇습니다. 아이가 생체 시간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면 현실 모독을 당하게 되고 성적으로 조숙해집니다. 말하자면 환경의 요구, 즉 어머니의 무관심이나 우울증, 비공감적 태도 등의 문제로, 아이는 현실을 너무 빨리 받아들이게 되면서 신체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던 자신만의 고유한 생체 시간을 놓아 버리면서 신체를 우주적 시간, 외부의 물리적 시간에 빨리 맞춰 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꼭 어린아이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청소년들이 부모의 요구에 의해 자신의 존재와 신체의 현재적 상태를 누리지 못하고 공부에 열중하게 되면 그때에도 생체 시간을 놓쳐 버립니다. 그 결과 어느 순간 현실을 놓아 버리는 퇴행의 상태로 내려가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놀이’입니다. 놀이는 자아를 자기에 접촉하게 만들어 주죠. 이때 놀이는 신체의 동작을 일으키는 놀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체에서 멈춰진, 또는 어느 한 곳에 고여 있는 리비도를 신체 전체로 흐르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