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창조(3) : 놀이와 게임

놀이와 게임의 차이


탐구자 :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도 놀이를 한다고 말할 수 있나요?


분석가 : 그 둘은 다릅니다. 놀이는 포화점이 있습니다. 즉 실컷 놀고 나면 ‘잘 놀았다. 이제 공부해야지’ 하는 지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놀이는 중독이 없습니다. 그러나 게임은 중독이 있으며, 하면 할수록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놀이를 잘하고 나면 존재의 만족감을 얻게 되고, 스트레스가 해소되면서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게임을 하다 보면 허무감과 공허감을 줄 뿐 아니라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고, 그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염증을 일으키면서 몸을 경직되게 만듭니다. 놀이는 본능욕구를 승화시키지만, 게임은 승화를 일으키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충동적 반복을 요구합니다. 게임은 본능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놀이는 본능이 아니라 ‘자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탐구자 : 처음에 놀이와 자위를 대비하여 말씀하신 것이 결과적으로 자기와 본능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을 주는군요.


분석가 : 놀이가 진행이 되는 중에 성적 본능이나 지나친 경쟁의식, 또는 긴장이 올라오거나 비교를 당하는 상황이 되면 놀이가 깨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죠.


탐구자 : 요즘 게임은 옛날 같지 않게 차원을 많이 높이면서 놀이 개념으로 넘어오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나요?


분석가 : 동의합니다. 요즘 게임의 철학과 가치관이 많이 바뀌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게임마다 다르다고 봐야 합니다. 게임의 발전사를 보면, 동양의 게임은 매우 수동적입니다. 게임 제작회사에서 미리 규칙을 많이 만들어 내어서 그 규칙들 안에서 게임을 하게 만듭니다. 닌텐도가 대표적인 게임이라 할 수 있죠. 그게 다 일본의 주입식 교육 때문입니다. 게임이 놀이가 되기 위해서는, 아이가 그 게임을 통해서 자기 존재에 대한, 또는 세상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서양의 게임은 자유의 확장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집니다. 규칙을 뛰어넘고,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가는 형태로 발전해 왔다고 합니다. 아까 철학자께서 니체가 어린아이가 초인을 암시한다고 말한 점은 바로 어린아이는 스스로 놀이의 규칙을 만들어 내는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는 자유의 확대가 근대사 전체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미국은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프랑스는 왕조를 무너뜨렸습니다. 게임을 하면 할수록 스트레스가 쌓여간다는 것은 몸의 자유를 빼앗아 가는 것이지만, 놀이는 몸을 자유롭게 해 주죠. 놀이는 몸이 노는 것입니다. 몸이 놀이를 한다는 것은 뇌의 활동, 감정의 발산, 근육 활성화 등 각종 신체기관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놀이를 하는 만큼 몸의 만족감, 자기의 충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탐구자 : 게임이 놀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그런 것이겠군요.


분석가 : 그렇죠. 게임은 몸을 사용하기보다는 신체의 일부만을 사용하죠. 뇌의 일부, 손 근육의 일부를 사용하는 게임으로 오히려 몸을 빼앗아서 흡수를 해 버립니다. 그리하여 게임 중독에 빠지게 되면, 모니터 안으로 몸이 들어가 버립니다. 그때 게이머는 신체 감각을 잃으면서 시와 때를 분간하지 못한 채 밥을 먹지 않고 밤새 게임에 몰입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됩니다. 몸이 모니터 안으로 빨려 들고 나면 모니터 앞에 남아 있는 사람의 신체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게임은 몸을 사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몸을 게임에 빼앗겨 버립니다. 게임 중독 상태에 이르게 되면 몸이 모니터 안으로 흡수되어서 모니터 밖에는 신체도 아닌 ‘고기’만 남아버립니다. 그래서 게임으로는 스트레스 해소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게임을 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하고 나면 짜릿함을 느끼게 되죠. 그 짜릿함 때문에 게이머는 갈수록 중독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게임 속의 인물들과 내용들은 몸의 통제를 벗어난 환각이 되어 버립니다



술, 몸이 빠진 향연



탐구자 : 성인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술을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하지 않습니까? 술을 마시는 것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될까요? 그리고 술 마시기가 놀이로서 효용이 있을까요? 보통 사람들은 ‘술 마시고 논다’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잖아요? 옛날 선비들은 술을 마시면서 풍류를 즐기는 등 잘 놀았던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분석가 :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것은 몸의 흥분상태를 가라앉히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몸은 더욱 흥분 상태로 되어갑니다. 그래서 오히려 술을 먹을수록 스트레스가 관리되는 것이 아니라, 배(倍)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술은 놀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먹으면 먹을수록 스트레스가 쌓이니까 2차 가고, 3차 가는 거죠.


탐구자 : 그런데 한국에서는 남자들 모임에서 술을 빼놓고 만날 수는 없는 엄연한 현실이 있거든요.


분석가 : 탐구자가 말하는 ‘엄연한 현실’ 중에는 다른 사회에서는 매우 비정상적이고 비현실적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엄연한 현실’인 경우들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술 권하는 사회 자체가 문제인 것이죠. 술 없이는 모임이 안 된다는 것 자체가 그 사회, 또는 그 조직이나 멤버들이 얼마나 건강하지 못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탐구자 : 그런 역설이 발생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네요. 스트레스가 생기면 술을 마시고 싶고, 그래서 술을 마시게 되지만, 술은 마시면 마실수록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고 신체는 더 흥분된다는 현실 말입니다. 그 결과 술 마시는 당사자는 그 술로 인해 몸만 더 망가지는 아니겠습니까?


분석가 : 그렇게 술 권하는 사회 자체가 문제인 것이죠. 술 없이는 모임이 안 된다는 것 자체가 그 사회, 또는 그 조직이나 멤버들이 얼마나 건강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게임이나 도박, 술 등 중독을 부르는 데에는 공통적인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주는 ‘짜릿함’ 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짜릿함 때문에 끊어내지 못하는 것이거든요. 그 짜릿함은 일종의 환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신 안에 행복이나 만족감을 얻기 위해 스스로 환상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외부적 현실, 자신이 처한 상황만 가지고 만족이나 행복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 현실이 내 안에 만족이나 행복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환상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돈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종잇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돈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은 내 안에 있는 환상이지요.



놀이 세계: 아기와 어머니 사이의 잠재적 공간


탐구자 : 놀이가 아기와 어머니 사이의 ‘잠재적 공간’이라고 위니캇이 말했는데, '잠재적 공간’이란 ‘중간영역’을 말하는 것이겠죠?


분석가 : 그렇습니다. 아기에게 가장 좋은 장난감은 바로 어머니입니다. 두 존재가 절대적 의존기에는 융합되어 있다가, 상대적 의존기가 되면서 아기와 어머니 사이의 분리로 인해 생기는 공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공간이 됩니다. ‘잠재적’이라는 말이나 ‘중간’이라는 말은 환상과 현실 사이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이런 공간에 머무는 동안 환상을 충분히 누리다가 궁극적으로 그 환상을 현실화시켜 주는 존재인 거죠. 특히 어머니를 장난감으로 놀이하면서 아이는 자기 변형을 경험하게 되고, 존재상승을 위한 힘을 얻게 됩니다. 이때 유아는 자아와 자기 사이에 리비도 교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기가 자기 리비도를 어머니에게 건네주면, 어머니는 그것을 받아 소화해 내면서 그 아이의 성장에 필요한, 아이의 존재 규격에 맞는 형태로 변형하여 되돌려 주는 형태로 리비도 교환이 일어납니다.


탐구자 : 위니캇은 놀이를 성장을 촉진하고 건강한 것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분석가 : 놀이세계는 경쟁이 멈추는 공간이자 경쟁력을 갖추는 공간입니다. 유아기 아동기 때 놀이경험이 충분하면 젊었을 때뿐 아니라 노인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성장하고 성숙해 간다는 것이 위니캇의 관찰입니다. 놀이라는 것은 늘 환경에 대한 신뢰를 일으키기 때문이죠. 환경은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정된 속성과 늘 변화하는 유동적 속성입니다.


탐구자 : 아이에게는 어머니가 바로 ‘환경’이라 그러지 않으셨나요


분석가 : 그랬죠. 아기에게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늘 고정된 위치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머니는 한 남편의 아내로서의 역할도 함께 감당해야 하는 유동적인 존재이죠. 유아는 어머니가 처음에는 자신에게만 딱 고정된 존재라고 여겼지만(절대적 의존기) 알고 보니 어머니는 내게는 어머니로서 남편에게는 아내로서 역할을 동시적으로 하는 복합적 존재임(상대적 의존기)을 인식하게 되죠. 유아의 입장에서 보면 어머니는 아기 자신의 모든 상황에 대처해 주는 매우 유연한 대상이었다가 점차 어느 부분은 유연하지만 어느 부분은 냉담해지고 딱딱해지는 대상이 되기도 하죠


탐구자 : 그렇게 되면 아기가 겪는 정신적 충격과 고통은 말도 못 할 정도가 될 수도 있겠군요.


분석가 : 물론입니다. 그 충격은 엄청납니다. 그것이 바로 인격적인 인간이 되어가는 데 있어 마땅히 필요한 성장통이죠. 특히 오이디푸스 시기(만 3세~6세)가 되면 아버지가 중간에 개입해 들어오면서 아기는 어머니에게 내편이 되어 달라고 눈치를 주지만, 아무리 눈치를 보내도 어머니는 내편이 아니고 아버지 편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죠. 고기처럼 유연하던 어머니가 돌처럼 딱딱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아이로서 얼마나 큰 충격이겠습니까? 아기에게 장난감의 변형 과정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유아는 어머니를 가장 좋은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다가, 곰 인형 같은 부드러운 중간대상을 어머니 대신으로 삼더니 점차 딱딱한 장난감을 선호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아이는 부드러운 대상뿐 아니라 딱딱한 장난감까지 대상으로 다루어 낼 줄 아는 유연하고 폭넓은 창조성을 내면에서 자랄 수 있게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이는, 냉담하고 거절 투성이자 딱딱하기만 한 세상에 대해 적응해 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자신에 대해 혹은 저항력과 적대감을 드러내는 세상에 대해 내면화된 창조성으로 다루어 내는 법을 아이는 터득해 나가게 됩니다.






월, 금 연재
이전 10화놀이와 창조(2) :  놀이를 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