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성(1): 플라톤의 교육론

창조성이란?


탐구자 : 창조성이란 것이 무엇일까요?


분석가 : 위니캇은 창조성을, 성공하거나 칭송받는 예술품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실재에 대한 총체적 태도를 채색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다시 말해서 외부에 존재하는 존재물들, 상황들을 내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자기화’(appropriation)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하여 창조는 위대한 예술가나 문학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살아 있는 존재를 표현할 때 그것은 창조적인 활동이 되는 겁니다.


탐구자 : 창조성의 반대는 파괴성인가요?


분석가 : 언어적 의미로는 창조의 반대가 파괴이죠. 그러나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면 언어적 대비보다는 정서적 의미를 대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위니캇은 ‘창조성’에 반대되는 개념은 ‘순응’이라고 보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성이 발휘되지 못하게 하는 상황에서 아이는 순응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창조성은 자신 안에서 역동하는 리비도를 어떤 목표를 가지고 공격성을 분화시켜 창조적으로 바꿔내는 과정이지만, 순응은 반대로 공격성을 가지고 리비도를 억압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어요. 창조적인 삶과 순응적인 삶은 각각 건강함과 병적인 삶을 대변합니다.



탐구자 : 창조와 순응이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교육현장을 보자면, 우리의 교육은 창조적인가요 순응적인가요? 답은 뻔한 것 같지만 한번 질문을 해 보는 겁니다.



분석가 : 우리나라의 교육형태 - 사교육을 포함하여 - 와 가장 유사한 형태의 교육을 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어떤 면에서 유사하냐 하면, 민족성 안에 본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교육에 대한 열정과 교육에 부모가 개입한다는 면에서 유사합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교육의 결과의 차이가 엄청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머리가 탁월한 민족을 꼽으라 하면 유대인을 꼽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세계 최고의 지능을 가진 국가는 대한민국의 평균 IQ 107이고, 유대인의 평균 IQ는 95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노벨상의 20%를 유대인이 가져갔고, 우리나라는 0%입니다. 물론 노벨평화상은 내용 진행상 제외됩니다.



탐구자 : 그런 격차가 왜 벌어지는 것인가요?


분석가 : 차이는 교육의 목적과 목표의 관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나라 교육의 목적은 ‘홍익인간’입니다. 두루 널리 이롭게 하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죠. 그런데 교육이 지향하는 목표는 목적과 전혀 무관하게 좋은 성적과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는 목표를 설정해 놓고 있습니다. 우리 교육은 인성과 전혀 무관한 공부하는 기술들을 가르치는 교육으로 전락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능가하는 경쟁력과 유능함과 탁월함의 능력을 얻는 교육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의 교육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육하여, 성경적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볼 때는 유대인만의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엘리트 의식이나 특권의식, 일류병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패배 교육’을 받습니다. 그들의 기도문은 ‘우리는 이집트의 종이었다’로 시작합니다. 그에 비해 우리 교육은 ‘성공 교육’이죠. 그래서 성공하는 상위 1%의 엘리트들을 위한 교육이 되면서 99%를 패배하게 만드는 교육이라면, 유대인의 패배교육은 100%를 살리는 교육이 된 겁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소수만의 특권의식을 강조하지만, 유대인들은 모두 동일선상에서 출발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가정에서는 내 자식만의 특별한 탁월함으로 세상의 권력을 얻게 만드는 교육이라면, 유대인의 교육은 내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돌려 드려서 세상을 살리는 교육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두 나라 교육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우리 교육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탐구자 : 그러면 오늘날 우리 교육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분석가 : 저는 교육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교육의 모델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 교육 시스템은 평균 수명 60세 기준의 초기 산업형 모델이라는 겁니다. 그런 모델에서의 교육의 유효기간은 40~45세까지입니다.


탐구자 : 일반 직장인들도 정년이 55~60세인 것을 보면 40~45세는 너무 짧게 잡은 것이 아닌가요?


분석가 : 아닙니다. 학교 교육에 사회 교육을 합친다고 해도, 그 능력의 정점은 40세입니다. 분야에 따라서 45세까지 볼 수도 있지만, 그 이후에는 능력의 가속도 때문에 발생하는 관성의 법칙에 의해 55세까지 유효해 보이는 것이죠. 40세가 넘어가면 직급이 이미 올라갈 만큼 올라가 조직의 힘으로 버티는 것일 뿐 능력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직장인 남자들이 40세만 넘어가면 꼭 시선을 다른 곳에 파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 거죠. 몇 년 전에 타임지 표지 모델로 갓 태어난 아이가 나온 적이 있어요. 과학자들은 그 아이는 142세까지 살 수 있다고 예측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현재의 교육제도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약 100년간을 의미 없는 세월을 보내게 될 겁니다.


탐구자 : 그렇다면 교육제도가 평균 수명 120년을 바라보고 개혁이 되어야 되겠군요.



플라톤의 교육론


철학자 : 플라톤은 [국가]에서 자신의 교육론을 피력하는데, 후대의 철학자 루소는 “사람의 손으로 쓴 가장 훌륭한 교육론”(William Boyd(1964). The history of western education. 이홍우 외 역(1996). 서양교육사. 서울: 교육과학사. 52)이라고 찬사를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 플라톤 역시 통치자를 위한 교육론을 주장한 셈이지만, 4차 혁명을 앞둔 우리 사회에서 직접 적용할 수는 없어도 그 의미를 새겨볼 필요는 있습니다. 플라톤의 교육의 목적은 ‘이데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크게 무시케(mousike) 교육, 김나스티케(gymnastike) 교육, 개별과학(mathamata)에 관한 교육, 그리고 변증법(dialektike) 같은 철학 교육으로 나눕니다. 무시케 교육은 17세까지 받는 시가교육으로서 문학과 시 그리고 음악을 포함하고, 20세까지 받는 김나스티케 교육은 신체를 다루는 교육으로서 오늘날의 체육 교육에 해당됩니다. 체육 교육의 중요성은 통치자, 또는 나라를 지키는 수호자들이 용기와 절제를 키우는 데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무시케나 김나스티케 교육의 핵심은 모두 영혼 발달을 그 목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20세부터 30세에 이르기까지 개별과학 공부는 산수학,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과 같은 과목들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교육과정을 통해 선발된 자가 그다음 단계인 철학을 배우게 되죠.


탐구자 : 플라톤의 교육 자체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잠재력과 본성을 창조성으로 끌어내는 과정이라 볼 수 있군요. 플라톤에 의하면 초기 교육에 해당되는 20세까지는 본격적인 예술 교육이지만, 그 예술교육은 놀이 교육이군요.


철학자 : 그렇죠. 결국 예술교육은 놀이를 통해 몸의 영역을 먼저 활성화해 놓은 다음에 세상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하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영혼과 눈에 보이지 않는 신적 영역을 성찰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교육입니다.



탐구자 : 요즘은 영상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데, 영상적인 것은 창조성과 연결될 수는 없는 것일까요? 기성세대가 신세대에 밀리는 것은 디지털적 사고에 미치지 못하여서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좇아가지 못하는 것이거든요. 과거에는 30대는 40대와 경쟁해야 했고, 40대는 50대와 경쟁해야 했죠. 그런데 요즘은 아닙니다. 40대가 되어도 20대와 경쟁해야 하고, 50대는 30대와 경쟁해야 돼요.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와 경쟁하지 못하면 경쟁력 있는 경제적 활동을 멈추게 되어 있습니다.



분석가 :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와 경쟁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좇아갈 수 있죠. 100세까지 산다는 것은 그냥 생명을 연명해 가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50세까지는 학교에서 배운 실력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그다음부터는 도태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다음 단계의 실력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의 변방에서 연명해 가는 것이 아니라, 100세까지 경쟁력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철학자 : 성경이 천지가 변하여도 일점일획도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영원한 경전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플라톤의 교육론이 오늘날과 앞으로의 미래에도 유용한 이론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불변의 이데아, 형상 등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탐구자가 거론하는 영상의 시대니 디지털 시대니 하는 것들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 늘 변화하는 현상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삶의 편의를 제공해 주고 경제적 활동에 주도적인 기능을 갖추게 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변하는 진리,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들은 아닙니다. 진정한 창의성이라는 것은 현상적인 것 이면에 있는 불변적인 것을 발견하고, 그 둘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삶의 의미와 존재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탐구자 : 신세대적 사고나 삶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을 정신분석적으로 본다면 어떤 점을 거론할 수 있을까요?


분석가 : 펄벅이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쓴 소설들이 몇 권 있어요. 그중에 소설은 아니지만, Korea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번은 경주를 방문했다가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어떤 장면에서 펄벅이 깜짝 놀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것은 약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밥을 먹는데 한 손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동시에 쥐고 자유자재로 번갈아가면서 사용하는 것을 보는 대목이었어요. 펄벅은 어릴 때부터 선교사인 부모님을 따라 중국에서 자란 사람이었지만, 젓가락 문화권인 중국에서 조차 볼 수 없었던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탐구자 : 최근에 조선일보(2018, 1, 20일 자)에서 한현우 논설위원이 ‘역 디지털 격차’ 현상을 언급하더군요. 미국의 저소득층은 자녀에게 스마트폰을 사주면 하루 종일 갖고 놀게 하지만, 고소득층 아이들은 나무로 만든 장난감 놀이와 잔디밭 뛰어놀기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분석가 : 나도 그 칼럼을 본 적이 있습니다. 휴대폰에 빠지는 사람이 많을수록 많은 돈을 버는 실리콘밸리 부모들이지만, 그들도 정작 자기 자녀들에게는 13세까지 스마트폰을 사 주지 않고 소셜 미디어도 금지한다고 합니다. 실리콘 밸리 사립학교는 스크린을 없애는 반면, 근처 공립학교들은 학생 1명당 아이패드 1대를 구비해 놓았다고 합니다. 런던의 임페리얼 대학의 로저 니본 교수는 요즘 의대생들이 상처를 째고 꿰매는 간단한 시술조차 제대로 못하는 이유를 손재주를 익히기보다 스마트폰 만지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니본 교수는 “상처를 꿰매려면 손가락을 3차원적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스마트폰 위 손가락은 2차원적으로 움직인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했습니다.(조선일보, 상동)


탐구자 : 그러고 보니 요즘 젓가락질을 사용하면서 세 손가락을 쓰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아마 펄벅이 그런 아이들을 보면 한 번 더 놀라게 될걸요?


분석가 : 요즘 군대 훈련소에서 훈련의 가장 기본이 제식훈련인데, 좌향좌 우향우를 못하는 사람, 또는 걸을 때 발을 못 맞추는 사람이 있어요. 40년 전에는 그런 사람이 한 중대에 한두 명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거의 절반이 발을 맞추지 못한다고 합니다.


탐구자 : 군기가 빠져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분석가 : 몸이 안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니 군기가 빠질 수밖에 없죠. 정신과 몸의 통전이 안 되는 겁니다. 정신이 요구하는 대로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 문화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3차원적으로 입체적 존재로 살지 못하고 2차원적인 평면적 삶을 살아가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탐구자 : 요즘 청소년, 청년들 중에는 젓가락질을 제대로 사용을 못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어요. 젓가락을 사용하면서 세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가 않더라는 겁니다.


분석가 : 내가 봐 온 몇몇의 청년들은 젓가락을 손이 감당을 제대로 해 내지 못해 이상한 형태로 집더군요. 젓가락을 잡을 때, 세 손가락을 사용하지 못하고 두 손가락만을 가지고 갖가지 재주를 부려가면서 잡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의심을 해 봤습니다. 혹시 그들은 3자 관계(아버지-어머니-나)가 되지 않는, 즉 2자 관계(어머니-나)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 말입니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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