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성(2): 창조성은 건강한 사람의 지표

여성적 요소 vs 남성적 요소




창조성은 건강한 사람의 전유물인가


탐구자: 창조적인 사람은 모두 건강한 사람인가요? 창조적이지만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은 것 같던데… 예를 들면 고흐 같은 화가 말이죠. 자기 귀도 자르고 그것을 또 자화상으로 그리기도 하는 등, 일종의 기행(奇行)이 창조적인 작품으로 남게 되는 것을 승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요?


분석가 : 예술 작품들 중에는 창조성의 결과일 수는 있으나, 창조성이 반드시 건강한 사람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죠. 고흐의 작품들은 자신의 우울증이라는 정신적 상황을 그대로 그림으로 드러낸 것이거든요. 그림으로 그려 냈다고 해서 그것을 통해 치유가 일어났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고흐의 그림은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잘 드러냈다는 면에서 창조성이 돋보이는 것입니다. 예전에 창조성의 반대는 파괴가 아니라 순응이라고 말한 적이 있죠? 고흐가 만일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었다면 그림을 통해 자신의 건강미를 드러냈겠지만, 그렇게 그린 그림은 위대한 예술 작품이 못 될 수도 있죠. 중요한 것은 그의 창조성은 순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창조성 그 자체가 꿈틀거리면서 살아 움직이는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겁니다. 누군가가 순응하지 않은 창조성의 원형을 그대로 드러냈다면 그 사람의 정신적 건강과 무관하게 예술적 깊이를 표출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탐구자 : 자신의 의식으로 의식화되지 못한 창조물을 예술적이라고 보는 근거는 뭘까요?


분석가 : 의식화된 작품은 오히려 예술작품으로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주기는 어렵습니다. 무의식 세계에 있는 창조성은 무한한 에너지를 담고 있어 자기 자신의 존재 이상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의식화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의 개인의 존재크기로 분화되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분화가 잘 된 사람은 개인의 크기만큼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화된 그림은 자기 존재 크기만큼 표현될 뿐입니다.


탐구자 : 그렇다면 예술은 집단무의식의 리비도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되는데, 개인의 인격은 개별화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예술은 왜 집단무의식적인 표현이 더 깊은 예술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게 되나요?


철학자 :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첫째,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취미판단을 언급하면서, 한 사람의 취미판단은 곧 모든 사람의 공통된 취미판단이라는 말을 합니다. 칸트에 의하면, 예술적 표현은 개인의 예술성을 표현이지만, 원형(archetype)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집단 무의식에 속한 것이라 할지라도, 의미상으로는 집단적이라기보다는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요소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술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공통된 판단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 작품이 다른 사람들의 공감이나 공통성의 크기를 불러오는 만큼 그 크기가 바로 예술성의 깊이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람의 존재라는 것은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존재의 얽힘이 복잡해지고, 그렇게 복잡한 만큼 상징적인 의미, 영성의 깊이, 영적 실재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 건강한 사람이 성인의 때에 이르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계기들을 겪어오면서 존재의 복잡한 분화를 성취해 온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노년이 되어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음을 준비해 가는 과정입니다.

나이가 들어 자기 존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게 되면, 삶과 죽음, 생명과 죽음의 경계가 보다 분명해지면서, 생명의 의미, 죽음의 의미가 각각 구별되고 존재 의미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예술이 개인의 존재를 넘어선다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집단성으로 간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술적 표현의 욕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존재 자체를 개인의 존재에 가두는 것보다는 개인의 삶을 초월하면서 표현하고자 하는 힘을 가지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 존재는 바로 ’ 자기’(self)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존재의 자체성에서 나오는 ‘형상’입니다. 그 형상은 인간적이며, 세계적일 뿐 아니라, 전 우주적이며, 신적 영역의 신비와 비밀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예술을 표현하는 개인이 얼마나 인격적이고 통합적인 사람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상처가 깊은 사람이 자기 존재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드러내면서 존재의 비의와 우주의 비밀과 영성의 깊은 것을 통달해 갈 수도 있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서양미술은 크게 두 가지 소재를 가지고 예술성을 표현합니다. 첫째는 성경이요, 둘째는 신화입니다. 그래서 서양미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두 가지를 모르면 작가가 그 그림에 새겨놓은 깊은 의미를 접근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측면은 서양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탐구자 : 사람의 인격이 성숙해 간다는 것이 곧 문화적 인간이 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문화적으로 빠르게 발달했는데, 그만큼 우리의 삶도 성숙해지는 것이라 볼 수 있을까요?


분석가 : 그런 현상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는 문화적 삶의 질이 높아진 것뿐입니다. 기술의 발달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보편적 현상으로 되었지만, 이것이 삶의 성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프리카 원시부족이 우리보다 훨씬 삶의 만족도가 높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문화적 삶의 질이 우리의 행복을 대변해 준다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의 성숙이라는 것은 자기 존재의 깊이를 자각해 가는 것입니다. 고흐와 같이 자신의 상처를 통해 남달리 존재의 깊은 곳을 표현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존재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미성숙함이 존재에 의해 더욱 크게 부각될 수 있을 뿐이죠. 사람의 성숙이라는 것은 자신 안에서 존재가 드러나거나 예술 작품이나 신앙을 통해 존재를 만날 때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취약성, 육체를 가진 인간의 한계성, 자신의 죄인임과 이기심 등을 자각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철학자 :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의 철학과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를 연구하면서 그들이 거론하는 ‘영혼’의 개념에 하나님의 존재를 보탬으로써 ‘자기’(self)의 개념을 발명하였기 때문에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성을 깊이 발굴하는 것과 타자성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한 인격 안에서 발현될 때 그 사람은 진정으로 ‘창조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여성적 요소와 남성적 요소가 창조성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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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자 : 사람에게 창조성은 언제부터 가지게 되는 것인가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인가요 아니면 후천적으로 획득하는 것인가요?


분석가 : 창조성은 누구나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지만 창조성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후천적으로 그것을 발현하게 되는 계기가 있어야 합니다. 창조성의 선천적인 면에 대해 위니캇은 창조적 충동을 '그 자체로'(per se)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위니캇은 예술가가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창조적 충동이 필요한 것이지만, 어느 시기의 어느 누구라도 자기 몸, 울음소리, 방귀, 심지어 똥을 가지고서도 놀이를 하거나 창작을 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창조적으로 살 때 인생을 살만한 것으로 가치를 부여하지만, 반대로 순응적인 삶을 살 때는 자신의 삶의 가치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됩니다.


탐구자 : 창조성의 후천적 발현을 촉진하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분석가 : 꼭 창조성뿐 아니라, 인격의 발달의 관점에서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부분이 바로 여성적 요소와 남성적 요소입니다.


탐구자 : 칼 융이 언급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에 관한 이야기인가요?


분석가 : 위니캇의 ‘여성적 요소’와 칼 융의 ‘여성성’이 같지 않고, ‘남성적 요소’와 ‘남성성’은 다릅니다. 창조성이나 인격을 이루는 요소들 중에 남성적인 부분과 여성적인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두 학자의 개념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창조성의 구성요소를 밝히라고 요구를 한다면, 나는 우선적으로 위니캇이 언급한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성이라는 것은 반드시 신체의 성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심리의 성은 신체의 성과 연동되어 작동합니다. 뿐만 아니라 외부 사물에도 성이 있죠. 독일어의 경우 명사는 반드시 성의 구별이 남성, 여성, 그리고 애매한 것은 중성으로 구별합니다. 그리고 동양학에서는 태양계의 별들도 남성의 별과 여성의 별로 구별하여 지구보다 안쪽에 있는 별은 여성의 별, 지구보다 바깥쪽에 있는 별은 남성의 별로 구별합니다. 융은 사람의 인격도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나누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성과 대상의 성을 잘 구별하는 것입니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의하면 – 나는 이 부분을 전적으로 지지하는데 - 남자아이는 아버지와 동일시되고, 여자 아이는 어머니와 동일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탐구자 : 위니캇의 말 중에는 “소녀들을 성적 경험으로 인도하는 남자는 자기 자신과의 동일시보다 자신 안의 소녀와 더 동일시되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그 남자에게 소녀의 성을 일깨우고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준다. 그는 그 대가로 작은 남성의 만족을 얻게 되고, 또한 대상-항구성의 반대에 속하는, 항상 새로운 소녀를 추구해야만 하는 욕구를 갖게 된다”라고 말한 부분이 있어요. 카사노바, 돈 후앙 등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분석가 : 맞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소녀를 만족시키기 위해 작은 남성의 만족을 얻게 된다’는 말이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작은 남성’는 ‘제대로 자라지 못한 남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어른이지만 내면의 정서적 자아는 자라지 못한 남자, 곧 ‘영원한 소년’입니다. 영원한 소년은 대개 마마보이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청소년 때나 청년 때에는 건장한 근육을 가진 남성을 동경하면서 동성애적 기질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이 어른이 되어서는 남자답게 살고자 여자들을 건드리고 다니면서 자신이 남자라는 것을 확인하거나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카사노바는 대개 마마보이라고 했잖아요? 그 말은 그 사람은 오이디푸스기(3~6세)에 아버지를 권위자로 내면화시키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 시기는 어머니를 놓고 아버지와 아들이 경쟁하는 시기인데,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권위가 없든가,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말씀이 더 권위가 있어서, 어머니를 놓고 굳이 아버지와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면 아버지가 아들의 마음속에 권위자로 자리 잡기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탐구자 : 아하! 그렇게 되면, 그 남성은 ‘작은 남성’이 되는 것이군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권위 있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세상을 보여주면서, ‘나의 권위를 잘 가져가면 세상도 그렇게 두려울 것이 없는 곳’이라는 것을 내면화시켜 주는 아버지입니다. 또한 그 아버지는 아들이 앞으로 살아갈 미래에 대한 목적과 방향성을 잡아갈 수 있는 키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작은 남성’을 가진 남자는 그런 권위 있는 아버지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죠. 그래서 살아가면서 목적의식을 갖기 힘들게 되고, 그 대신 작은 목표들을 세우면서 살아갈 수는 있죠. 목적의식과 목표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한 가정을 꾸리는 것으로 비유를 하자면, 목적의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 남자는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고 오손도손 살아갈 수 있는 안정된 가정을 꾸리는 것을 기본 마인드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남자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정지된 지점에서 가정이라는 것을 꾸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지된 지점을 가지지 못하는 남자는 계속 이 지점에서 저 지점으로 옮겨 다니면서 작은 목표를 세워가며 유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인데, 그것이 바로 카사노바의 삶입니다.

건강한 남자는 세상에 수많은 여자들 중, 한 여자를 마음에 두고 ‘저 여자와 평생을 함께 살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되고, 정지된 목적의식을 가지게 되면서 안정된 가정을 꾸릴 생각을 할 수 있는, 그 안에서 자신의 본성의 성숙을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작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이 여자 저 여자로 흘러가는 사람은 정지된 목적의식도 없고, 자신의 본성을 성숙시키지 못한 채, 본능충족을 위해 여러 여자를 번갈아 가며 취하는 데에 분주해집니다.

그렇게 만나는 여자를 통해 자신이 성적으로 남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일만 할 뿐, 자신의 남성적 본성을 성숙시켜내지는 못하고 맙니다. 카사노바는 여자가 가까워지는 것도 싫어하거든요. 왜냐하면 여자와 가까워지면 언젠가 자신을 사로잡은 어머니 같은 여자가 내면에서 툭 튀어 나올 것이기 때문에 그런 여자가 나오기 전에 빨리 도망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사노바는 여자와 여자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이 남자라는 확인을 늘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존재 의미입니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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