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자기(4) : 반동과 순응

(그림설명: 반동과 순응을 Dalle가 그렸다)

반동과 순응


탐구자 : 분석가께서 거짓 자기를 만들어내는 유아의 삶의 조건을 두 가지로 드셨는데, 순응은 쉽게 이해가 되나, 반동적이라는 것은 개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건 어떤 경우를 말하는 것인가요?


분석가 : 위니캇은 반동적 사랑을 예로 듭니다. 그는 반동적 사랑이란 첫째, 과장적이고, 둘째, 위조된 것이며 강제성을 띠며, 셋째,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세 가지 특징을 제시합니다. 순응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 시기에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반동적 사랑은 아동기나 청소년기, 청년기 등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확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두 가지는 각자의 성장과정에서 스스로 인식하거나 극복할 기회를 갖지 못하면 평생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탐구자 : 순응은 대개 ‘착하다’는 개념으로 이데올로기화된 것이어서, 인식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분석가 : 먼저 그 자체로 ‘선함’, 그 자체로 ‘좋음’과 ‘순응적인 착함’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착하다’는 것은 선함(goodness)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순응적 착함은 인격의 요소가 아니라, 억압의 결과로써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거나,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탐구자 : 흔히 ‘그 사람은 착하니까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믿고 있잖아요.


분석가 : 논리적으로 개념이 뒤집힌 것입니다. 평소에 착했던 그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했다면, 그것은 순응적으로 착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파생적 이원론 : 결핍의 결과


탐구자 : 위니캇이 자기를 참자기와 거짓자리로 나누었다면, 이원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요? 나와 너, 그리고 모든 사람, 이 세상의 모든 것, 우주와도 연결되며 심지어 하나님과도 연결성을 가지는 ‘자기’의 개념이 이원론적이라면 ‘자기’ 그 자체의 개념과 모순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가요?


분석가 : 날카로운 지적이긴 하지만, 이원론에 대한 오해입니다. 위니캇에 의하면 이러한 이원론은 본질적 이원론, 즉 참자기와 거짓 자기 사이에 연속성이 없는 각각의 본질을 가지고 있어 이원론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파생적 이원론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원래 본질은 하나인데 둘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지요.


탐구자 : 본질적 이원론이 아니라 파생적 이원론이라는 것이 이해는 가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 없을까요?


신학자 : 아마 위니캇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전통 위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보면, 본질적 이원론과 파생적 이원론에 대한 고민이 잘 나타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으면서도 자신이 오랫동안 속해 있던 마니교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본질적 이원론 때문이었습니다. 마니교에서는 선신과 악신이 있어 내 마음속에서 두 신이 늘 싸운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유일신이 아닌, 양신론인 것이죠. 아우구스티누스가 새롭게 접한 기독교의 하나님은 유일신이면서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실체를 가진 유일신이지만, 사탄은 존재는 하지만 실체가 없습니다. 만일 사탄의 실체를 인정하게 되면 마니교와 같이 양신론이 되어 버립니다.


탐구자 : 사탄이 존재는 하지만 실체가 없다는 말이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신학자 :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선과 악을 설명하면서 빛과 어둠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빛은 실체로서 존재하지만, 어둠은 존재는 하지만 실체가 없습니다. 어두운 방을 밝히기 위해서는 전기 스위치를 올리면 빛이 켜지지만, 환한 대낮에 거실에서 영화를 보고자 하여, 빛을 가릴 수 있는 어두움은 켜지지 않습니다. 즉 빛은 실체이기 때문에 켤 수 있지만, 어둠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둠이 빛의 결핍이듯이,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그 유명한 명제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분석가 : 위니캇은 인간의 본능들과 그 파생물들이 만들어내는 대립적인 쌍에 대해 몇 가지 예시를 합니다. 그것들은 삶과 죽음, 사랑과 미움, 건설과 파괴, 능동과 수동, 지배와 복종 등의 형태와 같은 대립쌍의 예입니다. 죽음의 삶의 결핍이고, 미움은 사랑의 결핍이고 등등. 이와 같이 이 대립쌍들의 후자는 전자의 결핍으로 파생되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탐구자 : 드라마나 영화에서,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사랑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좋아하는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거나, 별 것 아닌 일을 가지고 싸움으로 비화된다거나, 또는 매사 짜증으로 반응한다거나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어요.


분석가 : 그것은 가족 관계 안에서 좋은 관계 경험을 몸에 익히지 못한 결과입니다. 한 마디로 ‘관계 맺음’에 대한 미숙함 때문입니다.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은 그들의 부모님들이 ‘좋음’에 대한 표현을 못하고 살았기 때문이라는 그 자녀들도 좋음을 경험하지 못한 결과라는 결론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 관계 안에서도 사랑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미움의 형태로 표현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상대방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를 감당해 내는 것인데, 타인의 존재를 감당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확인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제시카 사건


분석가 : 1987년 미국 텍사스에서 누군가 파 놓은 석유탐사 시추파이프 안으로 제시카라는 18개월 된 아이가 빠져 들어가 이틀 반 동안 파이프 안에 갇혀 있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구조대가 제시카 구출 작업을 하는 동안, TV는 15분마다 전국에 방영한 유명한 사건입니다. 구조대가 땅을 파 내려가다가 제시카가 있는 지점이 가까워지자, 아이의 상태를 궁금해하는 전국의 방청객들을 위해 제시카가 살아 있다는 상황을 알리기 위해 숨결이라도 들려주려고 특수 마이크를 들이대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시카가 그 파이프 안에 갇혀서 혼자 흥얼거리면서 노래를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자세히 들어보니 자장가를 부르고 있더랍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제시카가 스스로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을 하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그동안 어머니가 자신에게 들려줬던 자장가를 부르면서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탐구자 :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분석가 : 그때까지 늘 듣기만 해 왔던 어머니의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는 것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제시카의 ‘참자기’를 작동하여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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