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자아와 제2 자아의 분화
어느 시골 동네에는 약 20 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마을이기 때문에 이웃집사정과 형편에 대해서는 서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소위 옆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잘 알 정도로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 어느 날 오후 2시쯤 중학교 1학년인 A라는 아이가 길을 가던 중에 동네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래서 A는 인사를 드렸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A의 인사를 듣은 할아버지는 지나가는 말로
"으응, 그래, 밥 먹었니?"
하고 물어왔다. 할아버지는 빈말로 한 것인데, A는 평소 거짓말을 못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이렇게 답했다.
"아뇨, 아직 밥 안 먹었어요."
할아버지는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A가 그 시간에도 밥을 챙겨 먹지 못한 사정에 대해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점심을 못 먹었지? 어머니가 집에 안 계시니?"
라는 물음에 거짓말을 못하는 A는 이실직고를 해야만 했다.
"네, 어머니는 집에 안 계세요."
할아버지는 또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급기야 내정간섭까지 하게 된다.
"너희 엄마는 왜 그렇게 맨날 싸돌아가기만 하냐?"
A는 또 거짓말을 못하니까,
"네, 엄마는 오늘 여고 동창 모인다고 해서 나가셨어요."
만일 A가 빈 말을 할 줄 아는 청소년이었으면, 이 상황을 스무스하게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할아버지를 지나칠 수 있었을 것이다.
거짓말이나 빈말을 못하는 A는 어머니가 이웃 어른께 욕먹게 되고, 굳이 알 필요도 없는 그리고 감춰도 되는 어머니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드러내고 말았다.
A는 왜 선의의 거짓말이나 지나가는 말, 즉 빈말을 못하는가?
아동이 사춘기 중 성적 개념을 가지게 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특히 남자 청소년은 성적 개념이 마치 외부에서 번개가 치는 듯한 충격을 몸으로 겪어내야 한다. 사춘기에 접어드는 건강한 남자아이라면 거의 100%에 가까울 정도로 대부분 자위행위를 하게 된다. 엄청난 생명 에너지로 꿈틀거리는 성적 욕망을 아무렇지 않게 그냥 넘어가는 남자아이는 없다. 자위를 하는 남자아이가 가지는 죄책감이라는 것은 어마무시하게 크게 엄습해 온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먹어서는 아담이 안 되는 선악과를 먹는 느낌에 가깝다. 무엇보다 이것은 나만의 비밀이 되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혹시 누군가가 내가 자위행위를 하는 것을 알면 어쩌나 싶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 떼는 습관까지 생겨 버린다. 사람들은 내가 착한 아이인 줄 아는데 나의 속 마음은 이렇게 더럽고 지저분하구나 싶다.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다. 끝까지 감춰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프로이트가 말한 제1 자아와 제2 자아의 분화가 청소년에게 일어난다. 성격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성경에서는 이를 속사람(제1자아)과 겉사람(제2자아)이라 부른다. 제2 자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하는 자아, 속마음을 감출 수 있는 자아라면, 제1 자아는 본래적 자아로서 외부로부터 감춰져야 하는 은밀한 자아가 된다. 이렇게 제2 자아는 청소년기, 청년기를 지나면서 사회적 자아로 자라게 되고, 그것을 곧 그의 사회적 페르소나가 된다. 프로이트는 청소년기에 제1 자아와 제2 자아의 분화를 건강의 징표로 본다.
사람이 외부적으로 제2 자아를 세울 수 있어야 상대방과 나의 차이를 서로 인정해 주고 공감해 줄 수 있게 된다. 제2 자아가 없으면 서로 융합이 잘 되어서 서로를 침범하게 되면서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나와 다른 요소에 대해 독으로 여기고 불필요한 싸움을 하게 된다.
거리감이 있는 사람과 마주치면 적절하게 빈말, 하얀 거짓말로 둘러대면서, 상대방이 내 삶의 바운더리를 넘어오지 못하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아동정신분석학자인 도널드 위니캇도 현실 속에서 적절한 거짓 자기를 사용할 줄 아는 것이 건강의 지표가 된다고 말했다. 거리감이 있지만 자주 마주치게 되는 사람과 빈말이나 하얀 거짓말을 하지 못하면, 그 사람과 관계의 끈을 놓치게 된다. 사람이 진실만을 이야기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아의 분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거짓말이나 빈말, 지나가는 말을 못 하게 되고 늘 사실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떤 아이는 사실이기만 하면 정황상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한다. 그래서 그 아이는 주변 사람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비난을 잘 받는다.
"너는 어떻게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이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
그 순간, 그 아이에게서 튀어나오는 말이 있다.
"사실이잖아요."
그 아이에게는 <사실 = 진리>가 되는 것이다.
평소에 빈말을 잘 못하는 어떤 여성은 제주도 장기 출장 간 남편이 모처럼 휴가를 내서 서울집으로 올라왔는데, 언니가 식구들을 이끌고 오겠단다. 조용한 남편이라 함께 외출할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오붓하게 단 둘이 지내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아 언니한테 오지 말라고 하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단도직입적으로 오지 말라고 하면 오해가 생기니까 대충 거짓말로 둘러대는 주변머리를 발휘해야만 했다.
"오랜만에 남편이 올라와서 아이들 데리고 영화 보러 가기로 했거든. 그래서 오늘은 언니가 오는 게 좀 곤란해."
라고 거절할 수 있었다. 그때 이 여성에게 교회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가 주변에 사람이 많고, 어른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바로 적절하게 가식을 부리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마치 참말인 것처럼 능숙하게 잘해 내는 데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사실만 가지고 살아가는 경우 그 사람의 삶을 매우 경직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 사실을 잘 말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사람은 드라마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얀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 빈말을 못하는 사람은 드라마나 영화보다는 동물의 왕국이나 뉴스 또는 다큐멘터리류의 기록영화를 좋아한다. 이런 사람은 동물의 왕국, 동물농장, 뉴스, 각종 다큐멘터리에는 일체 거짓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그 내용들을 흡수하기가 쉽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이 TV를 보면서 힘겨워하는 장르는 드라마나 영화 분야이다.
이런 사람은 허위(거짓)와 허구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는 허구로 구성될 뿐, 그것이 허위나 거짓이 아니다. 어떤 소설가가 소설을 쓸 때는 무협지나 애니메이션이 아닌 한, 어느 정도의 사실을 바탕으로 쓰게 된다. 소설은 약 20%의 사실을 기반으로 나머지 80%는 상상력이 발휘된 허구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어느 왕의 일대기에 나오는 어느 사건을 드라마화하여 사극을 만든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사실을 기반으로 할 뿐, 나머지는 연출자나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력으로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자아의 분화가 안 되거나 덜 된 사람은 이런 사극을 보면서도 늘 켕기는 것이 있다. "저 부분은 과연 사실일까?" "저건 거짓말 같은데, 적어도 사극인데 저런 거짓말을 해도 되나?"라고 생각하면서 사실에서 어긋나 있는 부분에 대한 불편감을 감추지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