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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어학연수 실패기.

04. 우울은 전염된다.

by 규민 Jan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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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감정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특히 우울은 감정 중에 가장 강력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나라고 이 답답한 상황에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껏 영국까지 왔는데, 이렇게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있는 사실이 더욱더 나를 힘들게 했다.

3년간 꿈꾼 빨간 2층버스, 세련된 영국 악센트, 전통적이면서 모던한 영국신사는 없지만 그래도 브리스톨을 즐기고 싶었다.


'있지, 뭐든 하나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든, 너의 성격이든, 적어도 반이라도.'


런던에 있던 친구는 헤어지는 날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뭐든 하나는 바뀌어야 한다고.


 



브리스톨에 돌아오자마자, 담임선생님께 상담을 요청했다.

레벨을 낮춰달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특유의 손짓으로 한사코 거부했다. 나는 아주 잘 해내고 있으며,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는 말이었다.


"아뇨. 전 더 잘 해낼 수 없는데요."


나의 완강함에 선생님은 무엇이 힘들게 하냐고 물었다. 회화수업이 벅차다고 했다.


"누구랑 대화할 때 가장 힘드니?" "아서랑 빈센트요."


아서와 빈센트는 우리 반에서 키가 제일 크고, 영어를 아주 잘하는 벨기에, 독일 출신의 10대 소년들이었다. 둘은 언제나 여유로워 보였으며, 6개월 정도의 짧은 연수를 마치 겨울방학처럼 즐기고 있었다.

선생님은 잘 알았다며, 일단 돌아가보라고 했다.


다음 날 수업 시간이었다. 어김없이 옆 자리 사람과 짝을 지어 대화를 하는 수업이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이 날 내 옆은 아서였다.


'아서. 이렇게 자리를 바꿔서 다른 사람이랑 할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무안하고 부끄러웠고 도망가고 싶었다. 마치 선생님께 '나 얘랑 이야기하기 싫어요."라고 고자질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허무한 감정이 따라 올라왔다. 레벨을 바꿔주기를 거절한 대안이 고작 이거라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용기를 낸 시도가 이렇게 흐지부지 된다는 게 너무 어이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일하게 친해진 한국인 언니에게 고민을 나눌 수도 없었다.

언니는 나보다 더 힘들어하고 있었다. 항상 매일 아침 나를 보면, 본인이 어젯밤에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 말했다. 같은 방을 쓰는 한국인 언니가 술에 진탕 취해 새벽에 들어와선 내내 울어서 잠을 잘 수 없다, 지금 살고 있는 홈스테이를 바꾸고 싶다 등등등.  


거기에 내 힘듦을 말하는 건, 누가 누가 더 힘드냐 대결하기 밖에 되지 않는 꼴이었다. 내 이야기는 꾹 참았으며, 언제나 괜찮은 척했다. 가끔 우울함을 드러내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언니한테 기대고 싶진 않았다.





일단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세인트마켓의 작은 디저트 가게에서 케이크를 먹기, 스타벅스에서 일기 쓰기, 굴다리 밑 빵집에서 샤워도우 사 먹기, 주말에 브리스톨 시내와 카봇타워 가보기, 학원에서 주최하는 펍행사 가보기. 등등. 한국에서도 좋아했던 작고 소소한 행복 같은 것들 말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마저도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뭐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무얼 해야 하는지.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하나는 확실했다. 우울은 전염된다.

아무리 감정의 구멍을 매워보려고 애써도, 메우는 속도보다 침투해 오는 속도가 빠르면 아무 소용없다.


내 감정은 매울 틈도 없이 조용히 매일 뚫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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