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런던의 작은 다락방.
알 수 없는 우울은 갯벌 같았다. 갯벌에 푹 박힌 두 다리를 아무리 빼내려고 몸부림을 칠수록 점점 깊이 빠질 뿐이었다.
언젠가부터 시간이 아깝기 시작했다.
여기가 한국이라면 자격증 준비라도 할 텐데, 이보다는 알차게 보낼 텐데. 남은 기간은 환불을 받고, 그 돈으로 유럽여행이나 하고 한국에 돌아가면 안 되나. 이 생각이 들자마자 걷잡을 수 없이 견딜 수 없어졌다. 더 이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 나 한국에 돌아가면 안 돼?"
엄마의 반응은 불 보듯 뻔했다. 전화 너머로 거품을 물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간 지 몇 달 됐다고 그러냐. 그것도 고작 못 버티냐. 이렇게 나약해서 어떻게 살래. 등등등.
예상은 했지만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엉엉 울기 시작했다.
더더욱 서럽게 했던 건 아빠였다. 엄마 옆에서 통화를 듣던 아빠는 전화를 뺏어 들었다.
한참 동안 나의 울음 섞인 서러운 성토를 들었다. 아빠는 가끔 깊은 한숨을 쉬었고, 엄마의 격양된 목소리가 끝없이 귓전을 울렸다.
"학원을 안 가도 되고 하루종일 그 방에서 안 나와도 되니깐 한국에 올 생각은 하지 마!"
한참을 듣던 아빠는 매몰찬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아빠는 나에게 유일한 믿을 구석이었다. 언제나 아빠는 온화했고 내 편이었다.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한국에도 내가 있을 곳이 없어졌다.
돌아갈 곳이 없어진 뒤 마음 둘 곳이 없어졌다.
마음이 공중에 붕 떠 정처 없이 떠돌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면 런던에 있는 친구의 작은 방으로 도망갔다.
브리스톨에서 시외버스로 2시간. 앞뒤 간격이 좁아 다리도 제대로 펼 수 없는 좁은 좌석에 몸을 구기고 런던으로 갔다.
파리여행에서 돌아오는 날도, 느닷없이 슬퍼지는 날도, 친구가 남자친구와 헤어진 날도, 동생이 영국에 온 날도.
친구의 방은 런던의 오래된 아파트, 부엌과 화장실 사이의 아주 좁디좁은 다락방이었다. 가늘고 긴 책상 하나와, 매트리스 하나면 방이 꽉 찼다. 매트리스에서 다리를 쭉 펴면 책상에 닿았다. 덕분에 책상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드라마를 보기에 딱 좋았다.
친구의 아파트에는 한국인이 3명 살았는데, 우리보다 2-3살 위인 오빠들이었다. 그중 한 오빠는 친구를 알뜰살뜰 챙겨주어서 내가 '친구의 엄마'라고 불렀다. 오빠는 종종 볶음밥이나 간단한 요리를 해주었고, 나는 친구와 부엌 구석에 앉아 그 모습을 구경했다. 볶음밥을 먹지는 않았다. 어딘가 서늘하고 허름한 부엌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저 좋았다. 타국에 온 이방인들끼리의 말 없는 위로 같았다.
밥을 먹고 나면 푹푹 꺼지는 매트리스 위에 쭈그리고 앉아선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보통은 대학교 이야기였다. 군대에서 제대하는 누가 말도 없이 편입을 했다더라, 누가 헤어졌다더라, 누구는 어디 가서 어떻게 지낸다더라. 그래도 할 말이 없으면 캐캐묵은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참 재밌었지. 라든가, 꼬질꼬질했던 인도 배낭여행 이야기라던가, 2학년 때 같이 살았던 이야기라던가. 그런 이야기는 해도 해도 또 재밌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좁은 매트리스에 나란히 누워 잤다. 아침이 되면 친구와 함께 밖을 나섰다. 친구는 지하철 역 근처 스타벅스를 갔고, 나는 지하철역으로 갔다.
다시 좁디좁은 버스자리에 몸을 구기고 일렁이는 마음으로 2시간을 갔다.
그러고 나면 조금 살 만했다. 가끔 런던에서 나눈 실없는 대화들에 피식 나는 웃음으로, 잠시 갯벌에서 들썩이는 찰나가 생기는 것만으로 조금 버틸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