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새벽까지 인터넷 쇼핑몰을 눈이 빠져라 들락날락했다. 남자 티셔츠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취향이 확고한 아빠의 옷은 고르기 쉬우면서 어려웠다. 튀는 색, 화려한 무늬와 디자인을 배제하니 남색 무지 카라티만 남았다. 그 옷은 대체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을 만큼 비슷비슷한 티셔츠들과 함께 친정집 옷장에 걸려있다가 얼마 전 우리 집으로 덩그러니 돌아왔다.
아빠가 지난 3월 2일 세상을 떠났다. 3년 암투병도 끝났다. 우리 모두 암을 얕봤다. 특히 당신이 제일 그랬던 것 같다. 식도암 3기 진단을 받고도 담배를 끊지 못해 가족들과 울며불며 싸웠던 나날이 쓰라린 기억으로 남았다.
마지막 8개월여는 종양이 숨통을 옥죄어 먹는 것도, 숨 쉬는 것도 고역이었다. 가래는 그렁그렁 차오르는데 야윈 등에서 날개 뼈가 뚫고 나올 기세로 기침을 해보아도 암덩어리가 막고 있어 쏟아낼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호흡곤란으로 여러 번 응급실에 실려 갔고, 폐렴으로 입퇴원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망할 놈의 코로나 때문에 며칠을 격리돼야 했다. 음식은 물론 물을 삼키는 것조차 못하게 되면서 몸은 장작개비처럼 말라갔다. 굶어 죽더라도 절대 배에 구멍은 뚫지 않겠다던 아빠는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결국 위루관을 달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꼈던 그즈음, 나는 세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가 지냈다. 빈 방 3개를 놔두고 네 명이 좁은 거실에 다닥다닥 붙어 누웠다. 아빠 옆에 놓인 산소호흡기 돌아가는 소리가 꽤나 소란스러운데도 엄마는 늘 곯아떨어졌다. 아마 기절했다는 게 맞다. 아빠가 수면제를 먹어도 깊이 잠들지 못하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니 같이 밤을 새우는 게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채 30분을 못 자고 깨어날 때마다 엄마도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환자도 환자지만 엄마 혼자 그 가혹한 밤을 지새우는 게 안쓰러워 거실에 함께 눕곤 했다.
수면제에 취해 1시간쯤 잤을까. 갑자기 스르르 일어난 아빠가 "여기가 어디냐"고 묻더니 창문 쪽으로 나가겠다며 안간힘을 썼다. 이를 막으려는 엄마를 거칠게 뿌리치고 매섭게 눈을 흘기기까지 했다. 그 낯선 얼굴로 내게 물었다. "저 아줌마 누구니?" 말로만 듣던 섬망(질환이나 약물 등으로 인한 의식장애) 증세였다.
누구보다 꼬장꼬장했던 아빠. 계획이 어긋나는 것을 싫어해 1부터 100까지 철저하게 준비하고, 약속시간에 늦지 않도록 1시간 먼저 도착하던 사람의 흐트러진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몸서리쳐지게 슬픈 일이었다.
“지난번에는 자다 말고 ‘홍보실 박 부장이 장난감을 사놨다는데 내가 갈 수가 있어야지~’ 그러시더라.”
아빠는 성실하게 일했던 이 차장의 시절 그 어디쯤에 있는 듯했다. 정신이 희미한 와중에도 손자에게 줄 장난감을 생각하고 있구나 싶어 코끝이 무지근해졌다가, 어쩌면 그게 어린 나일 수도 있을 것 같아 내내 참고 있던 울음이 터질 뻔했다.
엄마는 그 비극 속에서도 놀라울 만큼 씩씩했다. 아빠가 폐렴으로 위독했을 때 나와 통화하며 울먹거린 목소리를 들은 게 전부일뿐, 무너진 적이 없었다.
“나는 눈물이 안 나. 밥도 잘 먹어.”
자주 되뇌던 그 말이 무심함에 대한 죄책감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그건, 주저앉지 않으려는 일종의 주문이었다. 생사의 경계에서 어떻게든 이편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절박함. 울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안간힘.
세 번째 폐렴으로 입원한 아빠는 가정에서 사용할 수 없는 고용량 산소호흡기를 달았다. 고로 퇴원할 수 없었다. 죽일 놈의 코로나로 면회도 불가능했다. 밤이면 섬망이 와서 집에 가겠다고 주삿바늘이며 산소호흡기를 뽑아버리는 아빠를 오롯이 엄마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
무작정 아들을 들쳐업고 병원으로 향했다. 면회가 안 되면 드러눕겠다는 각오로 들어갔는데 웬일인지 막지 않았다. 좁은 침상에 구겨진 종이처럼 누워있던 아빠가 손주를 보고 힘겹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있는 힘껏 끌어올려 말했다. "집에 가자..."
그날 밤, 엄마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지만 아빠는 이미 떠난 후였다. 코에는 산소호흡기, 배에는 위루관. 주렁주렁 달려있던 생명줄들이 제거되고 있었다. 엄마는 아빠가 그토록 빼고 싶어 했던 산소호흡기를 내던지며 무너지듯이 울었다. 갈비뼈가 선명히 드러난 배에 남은 구멍이 미치도록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던 아빠는 사실 그토록 살고 싶어 했다.
발인하는 날, 앞이 안보일만큼 비가 내렸다. 남편이 운구차 기사에게 장지로 가기 전 집에 꼭 들러달라 부탁했다. 30만 원을 더 주고 좋은 리무진도 불렀다. 아빠는 그렇게 집으로 올 수 있었다.
6년 전, 아빠와 나는 제주도 이주를 꿈꾸고 있었다. 마침 제주를 배경으로 한 <맨도롱 또똣>이라는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는데, 그런 로맨틱 코미디는 쳐다도 보지 않던 아빠가 본방 사수할 정도로 우리는 이곳을 바랐다. 여기에 오면, 우리가 행복할 것 같았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 섬에서 아빠가 영원히 잠들어버릴 줄은 몰랐다.
아빠가 좋아했던 풍경과 예쁘다고 했던 집들을 지나 차를 달린다. 저기 한라산 보이는 곳에 2층 집 짓고 싶어 했잖아. 그런데 살아보니까 계단 오르내리기 힘들어 별로더라, 그치? 제주살이가 드라마처럼 멋지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았고.
이젠 이 외로운 섬에 아빠마저 없네. 우리 차가 언덕 넘어오기 전부터 마당에 나와 서성이던 아빠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