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ㅣ 코츠월드 로우어 슬로터
런던을 벗어나 코츠월드 지역을 두루 다니던 그날의 날씨 또한 더할 나위 없었다. 여행 내내 느꼈던 거지만 난 이번 여행에서 몇년 치 날씨 운을 죄다 쏟아붙고 있는 것 같다. 몽글몽글 피어난 흰 구름이 가뜩이나 낮은 하늘에 드리워져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듯했다. 얼마간 달렸을까, 다음 마을로 점찍은 로우어 슬로터 Lower Slaughter에 다다랐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예상대로 마을의 매너하우스였다. 작은 마을 축에 속하는 로우어 슬로터 또한 마을 한복판 볕 좋은 명당은 매너하우스 호텔 차지였다. 현재는 이렇게 동명의 호텔 간판을 내건 채 잠시나마 '고품격 전원생활'을 맛보려는 이들을 불러 모으고 있으나, 보다 오래전 매너하우스의 주인은 이 지역 영주와 그 가족들의 차지였을 것이다.
코츠월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된 적이 있는 명성에 비한다면 로우어 슬로터는 유명세를 치르는 몇몇 마을들과는 달리 밀려드는 방문객에 시달리는 마을은 아니다. 마을 안쪽 길은 물론이거니와 마을로 진입하는 도로 폭이 좁다 보니 대형차나 관광버스의 진입이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이런 이유로 그룹 투어객들에겐 문턱이 높은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하여 그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공을 들이는 일, 이를테면 마을 진입로를 넓힌다거나 주차장을 확보하는 따위의 노력은 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길 원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고집 혹은 뚝심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닌 듯했다.
화창한 여름날을 평화롭고 아기자기한 마을에서 보내고 있는 운이 좋은 방문자들도 간간이 보였다. 이들은 대체로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의 흐름만큼이나 느릿한 걸음으로 물줄기를 따라 거닌다던가, 몇 개 안 되는 카페를 찾아 햇볕 샤워를 하며 목을 축이곤 했다. 우리도 물론 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로우어 슬로터의 건물들도 예외 없이 특유의 노란빛을 띠고 있는데 이는 코츠월드 지방에서 나는 석회암을 재료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유명세 덕분에 마을 풍광은 뒷전이요, 겹겹이 주차된 자동차와 그들이 싣고 왔을 인파에 치이며, 한정된 시간만 머물다 떠나는 이방인들의 걸음을 멈춰 세우기 위한 상점가만 훑다가 흥미를 잃고 돌아 나오기 바빴던 게 앞선 마을에서의 우리 모습이었다.
로우어 슬로터에 이르자 비로소 볕에 그을린 노란빛의 코티지가 저마다 얼마나 근사한 파사드를 지니고 있는지, 촘촘히 올려진 벽돌은 어떻게 서로를 지탱해주며 세월을 버티고 서 있는지 찬찬히 담을 수 있었다.
거의 모든 집들이 온통 노란빛을 띠고 있어서일까. 한가로이 물가에서 시간을 보내는 단란한 가족에게서 눈을 떼니 한편에 있는 붉은색 벽돌 건물이 유난해 보였다.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붉은 벽돌집이겠지만 코츠월드에서는 다르다. 마을 끝에 자리하고 있으며, 거의 유일하게 붉은색의 벽채와 굴뚝을 지닌 건물은 오래된 물방앗간이 있는 곳으로 이 마을 유일의 박물관이기도 하다.
말이 나온 김에 이 마을의 볼거리를 굳이 꼽아보자면 이 오래된 물 방앗간과 함께 몇 안 되는 강가의 카페나 티룸 정도일 것이다. 볼거리가 제한적인 작은 마을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적어도 따스한 햇볕이 내려앉은 이날의 로우어 슬로터는 마을을 휘감아 돌며 잔물결을 일렁이게 했던 연풍만으로도 충분했고 완벽했다.
윗마을인 어퍼 슬로터 Upper Slaughter를 휘감고 흘러내려오면서 강폭을 넓혔다가 좁히기를 반복하며 로우어 슬로터 Lower Slaughter에 다다른 리버 아이는 가만히 가만히 흐르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있는 그대로 한껏 받으면서, 산들바람에 몸을 맡긴 채.
보통 마을 중심에 수로 혹은 강이 흐르는 대표적인 코츠월드의 마을로는 리틀 베니스라는 별명을 지닌 버튼 온 더 워터 Bouton on the Water가 먼저 떠오르지만 버튼 온 더 워터는 성수기를 피해 방문해야만 한가로운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반면에 성수기에 방문해도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풍광을 볼 수 있는 곳은 로우어 슬로터이다. 두 마을은 차량으로 고작 5분이면 닿는 위치에 있다.
물길을 따라 마을을 둘러보면서 오갔던 우리들의 대화 중에는 중세 유럽의 장원제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장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있는 매너하우스, 매너하우스와 가까이 있으면서 중세인들에겐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가장 중요한 존재인 교회, 그리고 먹고사는 데 직접적이고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물레방앗간까지.
하지만 지난봄 역사 시험을 본 후 낙담하던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던 탓일까. 애써 되새김질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들춰내는 눈치 없는 엄마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므로 아들 녀석 앞에서 더는 살을 붙이지 않았다. 더욱이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는 격변기를 보내고 있는 사춘기 소년 앞에서 여행 중 오고 가는 대화로는 언감생심이다.
로우어 슬로터를 포함하여 코츠월드 일대에 퍼져 있는 마을의 형태 자체가 오랜 옛날 장원의 모습 그대로를 읽어낼 수 있는 살아있는 교과서나 다름없었다. 아들 앞에서 꿀꺽 삼킨 한마디는 이것이었다.
수로를 따라가던 걸음이 마을 끝에 이르자 물줄기를 따라 돌아 나와 마을 초입에 다시 섰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만나보려고 아껴두었던 교회로 향했다.
매너하우스 옆에 있는 이 아름다운 교회를 부르는 이름은 세인트 메리 교회 The Parish Church of Saint Mary Lower Slaughter이다. 13세기 당시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교회라고 한다. 세월의 부침으로 외형의 변화는 어쩔 수 없었겠으나 13세기부터 현재까지 이곳에는 줄곧 교회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교회는 1867년에 초기 교회가 무너졌을 때 재건된 것이라고 하는데 교회 재건에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를 통해 당시 유행하던 건축양식이 아닌 초기 영국식 건축 형태를 기반으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어딜 보아도 교회라는 호칭보단 예배당이 더 어울리는 사랑스러운 외관을 한참동안 눈에 담다가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찌를 듯 높은 천고를 자랑하는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내부는 그간 무수히 봐 왔었다. 소박한 외양을 하고 나지막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예배당의 내부는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특히나 박공지붕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종류 불문하고 종교 시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체험이 있다. 나도 모르게 그간 납작하게 눌려있던 마음 한편이 설명하긴 어렵지만 특별한 기운으로 불룩하게 차오르는 느낌이 그것이다. 얼마간 머물며 기분 좋은 충만함으로 문을 나서려는데 교회 지기이거나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노신사가 다가와 불쑥 말을 건넸다.
"마리아와 조나단이었지. 지난주에 여기서 결혼식을 한 이들 말이야.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는지 상상도 못 할걸. 나는 지금 마리아와 조나단의 결혼식이 얼마나 근사했는지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평생의 연인으로 남을 것을 약속을 했어. 우리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 앞에서 서약을 한 거지. 바로 이 예배당에서 말이야"
처음 방문한 영국의 한 지그만 마을에서 일면식이 없는 한 노 신사는 마찬가지로 우리에겐 생면부지인 한 커플의 따끈따끈한 결혼 소식을 꺼내 놓는다. 속으로 당황하긴 했지만 마을 사람들을 통틀어도 250명 남짓인 이 마을에서는 꽤나 큰 이벤트였던 모양이다. 난 그렇게 이해했다. 무방비 상태인 우리에게 짧은 단문 몇 마디를 전하는 와중에도 연신 'lovely'를 남발하는 스위트함을 보이던 그 신사는 내가 들어본 가장 달콤한 뉴스를 전한 후 어찌할 바 몰라 웃음 머금은 표정으로 화답하는 나를 향해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유쾌한 손인사를 끝으로 총총 사라졌다.
교회를 나와 뒤뜰을 거닐어보았다. 앞뜰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묘비들이 넓은 부지에 흩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최초에 습한 땅을 일구어 정착한 후 삶을 이어나간 것은 1000년도 더 된 일이라고 한다. 교회는 예로부터 이 마을 사람들에겐 최고의 안식처였을 것이다. 사후라 해도 변할 게 없다. 무수한 마을 사람들이 영면하는 작은 예배당에서 오늘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영원을 약속하며 새로운 출발을 한다.
한가로이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았던 마을을 빠져나올 무렵 마주한 아름다운 작은 예배당에 이미 난 마음을 다 빼앗겼던 터였다. 그런 내게 예고 없이 날아든 달콤한 뉴스는 로우어 슬로터의 작은 예배당을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장소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로우어 슬로터를 떠나 또 다른 마을을 향해 차에 오르며 몽글몽글한 솜사탕 같은 달달한 추억을 함께 실어올 수 있을 거란 걸 미쳐 난 알지 못했다.
내내 볕이 좋았던 여름 어느 날, 영국 코츠월드 지역의 작고 예쁜 마을인 로우어 슬로터에서는 마리아와 조나단의 행복한 결혼식이 있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마을 예배당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