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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빅 Jun 20. 2019

에든버러 그레이

스코틀랜드 ㅣEdinburgh Gray

Edinburgh Gray

열차는 긴 호흡을 뿜으며 플랫폼 안으로 미끄러지듯 빨려 들어갔다. 웨이벌리역에 도착한 것은 런던을 출발한 지 약 다섯 시간 만이었다. 열차가 잠시 멈춰서 숨 고르기를 하는 사이 객차 내부는 내릴 채비를 하는 사람들로 술렁였다. 객차를 벗어난 무리 중에 나와 나의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들들 거리는 익숙한 소음을 뿌리며 우리를 따르던 두 덩이의 캐리어도 함께였다. 역사를 벗어나기 위해 가까운 출구로 향했다. 마지막 몇 개의 계단을 딛고 올라선 바로 그때였다.


"오! 우~와아~~~!"


계단끝에 선 아이가 여운이 긴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조금 컸다고 예의 그 잔망스러운 언행들을 쌀뜰이 거두어가시는 중인 녀석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나온 함성에 가까운 탄성이었다.


흥미로운 반응을 보이는 아이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녀석과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눈 앞에는 고색창연한 에든버러의 시티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그 전경은 매우 비현실적인 것이기도 했는데 흡사 거대한 세트장 안으로 예고없이 훅 빨려들어간 느낌이었달까.


이것이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찰나의 소회이다. 그 날 그 순간, 나 또한 외마디 감탄사로 낯선 도시에 대한 첫인상을 전했던 녀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풍스러운, 중후한, 기품 있는, 남성적인... 에든버러의 건물이 만들어 낸 스카이라인을 맞닥뜨렸을 때 연상되는 수식어들이다. 거리를 걷던 아이는 사이좋게 붙어있는 많은 건물들 가운데 똑같은 모양의 건물이 하나도 없음에 놀라워했다. 불과 얼마 전 떠나온 우리의 도심 풍경에 빗대어 했던 말인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말대로 올드타운의 건물들은 하나같이 들쑥날쑥 서로 다른 개성을 뽐내며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도 어수선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부터 의도된 연출인 양 극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높이도 모양도 제각각인 서로 이웃한 건물들은 밝은 회색부터 어두운 회색까지 온도는 제각각이었으나 하나같이 낮은 채도의 무채색 일색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얹어진 듯, 아니면 검게 그을린 듯한 시커먼 건물들이 사이사이 자리하여 음영을 조율하고 있었다. 혹자는 검은 옷을 입은 건물들을 보고 에든버러에 무시무시한 화마가 훑고 지나간 흔적이라 말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보면 그런 착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시커먼 흔적의 주범은 다름 아닌 '스코트 미스트'라고도 불리는 짙은 안개이다. 지독한 스코틀랜드의 안개에 의한 부식의 흔적인 것이다.


발아래 깔린 올드타운 로열 마일의 포석들 또한 중세의 어느 시절을 재현한 세트로 착각하게 만드는데 톡톡히 한몫하고 있었다. 발 밑으로는 세월이 닦아놓아 윤이나는 포석의 감촉을 느끼며 고풍스러운 건물들에 둘러싸인 채 걷는 기분은 조금 근사했다.




올드타운에도 어스름 저녁이 찾아왔다. 이 도시의 신비한 풍경을 완성하는 그 무언가가 존재를 드러낼 때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거리의 가로등. 고풍스러운 건물에도, 도로를 덮고 있는 반들반들한 포석 위에도 따스한 불빛이 내려앉았다. 가스등은 이미 오래전에 전기램프로 대체된 뒤 엇비슷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고는 하나, 어슴푸레한 빛을 뿜던 그 옛날 가스등의 운치까지 재현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촘촘히 서 있는 가스등이 차례로 점등되던 그때를 떠올리며 해 질 녘 올드타운을 걸었다. 아마도 이맘때쯤이지 않았을까. 가스등에 불을 밝히기 위해 거리를 돌았을 그 옛날의 램프 라이터가 길모퉁이에서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Lamplighter. 언제부터인가 '내부고발자'를 지칭하는 말로 인식되고 있으나 본래는 말 그대로 점등원을 뜻한다. 현재는 사라진 직업군이나 한때 유럽 전역에서 가로등으로 촛불이나 가로등 불을 유지 관리하기 위해 고용되었던 사람들이다.


변덕스러운 런던 날씨에 적응이 끝났노라 호기롭게 외치던 나는 런던의 몇 배쯤 변화무쌍한 스코틀랜드의 날씨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머리가 나쁜 탓에 에든버러를 떠날 즈음 그 사실을 깨달았다. 종일 거리를 적시던 부슬비가 그치기를 바라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스코틀랜드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던 그 밤, 우리를 다시 런던으로 데려다 줄 야간 슬리퍼는 자정 가까운 시각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낮에 코치를 이용해 하일랜드를 짧게 둘러보는 데이투어를 마친 후 우리는 다시 올드타운을 찾았다. 또 다른 동행인 안개비와 함께 나선 길거리에서 우리는 파고드는 밤공기를 막기 위해 겉옷을 한껏 여며야 했다.


밤 9시를 넘긴 올드타운에는 문을 연 식당도 많지 않았다. 체감하는 시각은 밤 11시를 족히 넘긴 듯했다. 허기는 참을만하다기에 아이와 나는 일단 걸어보기로 했다. 캄캄한 이 시각에 대관절 굳게 닫힌 고성에 무슨 볼일이 있겠냐마는 바위 언덕 위에서 밝은 빛을 뿜으며 손짓하는 에든버러 성을 향해 녀석은 무작정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성 앞에 다다른 아이는 굳게 닫힌 게이트하우스 아래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더니 이렇게 외쳤다.


"문 좀 열어 주시면 안돼요? 네? 거기 안에 있는 거 저 다 알아요, Open the door! Please~"

성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오래전에 끝이 났다는 사실을 일러도 들은 척을 않는다. 출입문 앞에서 최대한 몸을 낮춘 아이를 누군가가 보았다면 읍소라도 하는 줄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쉿~! 소용없어.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군인들이 저 안을 지키고 있대!"


이 한마디를 듣고서야 녀석은 옷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오랜 세월을 에두르는 사이 왕궁의 위용은 잃은 채 견고한 요새로서 바위산 위에 우뚝 서 있는 에든버러 성은 현재도 영국군 사령부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한다. 가을비가 내리던 추운 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멀찍이 물러서서 암벽 위에 초연히 서 있는 에든버러 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 유일했다.




에든버러 성을 뒤로하고 경사로를 따라 내려오면 성의 앞마당쯤 되는 Esplanade가 펼쳐져 있다. 한눈에 다 들어오는 크기의 광장에서 매년 수천 명의 관객을 불러들이면서 군악대 퍼레이드인 에든버러 밀리터리 타투가 개최된다는 사실은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광장을 가로질러 펼쳐진 산책길로 내려오면 그곳이 로열 마일의 시작점이다. 문을 연 상점이 보기 드물게 줄어 있었다. 관광객도 뜸해진 을씨년스러운 거리, 가라앉은 밤공기에 으스스한 조명이 더해지니 나도 모르게 파고든 한기에 몸을 한껏 더 움츠리게 되었다. 숨겨졌던 비밀 얘기가 스멀스멀 퍼져 나올 것 같은 거리 풍경이었다.


고요해진 올드타운 걷다 보면 누구라도 이 거리에 감춰진 이야기들이 궁금해질 터. 우리 또한 그랬다. 인적이 빠져나간 거리에는 비로소 본래의 주인들만이 남았다. 굳게 닫힌 채 세월의 더께를 얹고 꼿꼿이 서 있는 모호하지만 다채로운 회색조의 건물들, 신비로운 빛을 뿜는 가로등 그리고 촉촉이 내리는 비로 인해 불빛이 반사하여 반짝거리는 포석들.


이게 전부는 아니었다. 사람들의 활기에 가려져 좀처럼 눈에 띄지 않던 무표정한 거리의 동상들이 깨어나고, 로열 마일에서 거미줄처럼 뻩어나간 비좁고 음침한 골목, 골목들이 진한 선으로 다시한번 덧칠한 듯 선명해진다.


녀석이 무한 상상의 시동을 걸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적 드문 거리에서 만난 동상이 살아 움직이며 다가와 말을 걸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은 순전히 영화를 많이 본 탓일까. 아담 스미스의 절친이라는 데이비드 흄 아저씨가 성큼 다가와,


'어이, 거기! 혹 바쁘지 않다면 나와 함께 경험론에 관해 밤새 이야기라도 나누지 않을래? 그게 싫다면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너의 생각은 어떤지 들을 수 있을까?’


라고 덤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 데이비드 아저씨, 그런데 어쩌죠? 다른 얘기들은 너무 많은데 그거라면 들려드릴 얘기가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네요. 더우기 아저씨의 이야기 또한 하나도 못알아들을게 뻔하거든요. 죄송합니다만 정중히 사양할께요'



David Hume statue on Royal Mile


휑댕그렁한 낯선 도시의 밤. 그나마 거리를 따스하게 감싸는 가로등 불빛과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아들 녀석이 있기에 마음 든든한 밤이기도 했다.


"엄마! 자꾸 무슨무슨 클로스라고 쓰여 있네요. 클로스가 대체 뭘까?"


로열 마일을 걷는 내내 쉽게 눈에 띄어 누구든 한 번쯤 이름과 유래에 대해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 바로 클로스이다. 막다른 좁은 길을 뜻하며 그물처럼 뻗어나간 클로스는 과거 여왕이나 귀족들의 행렬을 피해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통행로였다. 넓게 뻗은 로열 마일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비좁은 길들이다.


강한 호기심을 재우지 못하고 한밤중에 몇몇 클로스는 직접 걸어보기도 했는데, 당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용기를 최대치로 끌어모아야 했다. 클로스 입구에 서면 심호흡이 절로 나왔고 아들과 맞잡은 손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어떤 클로스는 또 다른 클로스와 연결되어 있었고 또 다른 곳은 막혀있기도 했다. 보기만 해도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좁고 어두운 클로스를 넘나들며 녀석과 나는 입으로 주거니 받거니 짧은 미스터리 단편을 몇 편이나 써 내려갔는지 모른다. 그러다 던전 투어나 고스트 투어를 안내하는 오싹한 포스터라도 눈에 들어올라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를 지르며 냅다 내달렸다.

 

밝고 아름다운 이야기보다는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이야기들이 더 강하게 자리 잡는 법. 로열 마일의 클로스들은 아들 녀석의 호기심 세포를 톡톡 건드려 무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흑사병이 창궐하던 그 시절, 공포에 떨며 죽음을 맞았다고 전해지는 어린 애니의 슬픈 이야기를 품은 메리 킹스 클로스. 그리고 깜찍한 이름과는 달리 희대의 흉악한 강도인 브로디의 전설이 서려있는 브로 디스 클로스처럼 익히 알려진 무서운 혹은 잔혹한 이야기들 말고도 좁다란 클로스마다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스무 개쯤 숨겨져 있을 것 같은 올드타운의 거리였다.


아이는 키가 좀 더 자란 후에 다시 와서 고스트 투어에 참여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땐 아마 심약한 우리는 청심환 한 개씩 준비해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 지금과는 달리 거친 스코틀랜드 억양을 극복해낼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

 

이후 야간 슬리퍼의 뽀송뽀송한 침구에 몸을 뉘인 녀석의 표정은 피곤한 기색 없이 싱글벙글했다. 런던으로 이동하는 야간열차 안에서 아마도 아이는 클로스를 누비며 한 무리의 유령을 뒤쫓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한편을 찍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밤의 에든버러는 모호하지만 풍요로운 회색의 공간감에 휩싸이게 된다. 회색의 모호함은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를 내어준다. 도시가 품고 있는 비밀스러운 이야기에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무채색이 극대화된 밤의 도시는 특별한 시공간으로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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