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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빅 Feb 11. 2019

소란한 동행과 함께한 어느 보통날

런던 ㅣ에든버러를 향해 가는 우리 기차에는

숙소를 나와 올려다본 아침 하늘은 '다소 흐림'.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떠나는 날까지 이 도시는 나에게 따사로운 한줄기 볕조차 아끼고 있었다. 그래도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도시가 런던이다. 사방에 미스트를 뿌려댄 듯 촉촉한 대기가 오히려 반가운 날이기도 했다. 차창밖으로 안개가 피어오른 먼 바다 풍경을 마주한 채 작정하고 게으름 피우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가 아닌가.


속도와 이동성이 우선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지만 여전히 나는 활짝 열린 하늘길보다 조금 더 오래전 땅 위로 그어진 선로에 끌린다. 잠시 후부터 나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기대어 눈앞에 펼쳐진 풍광을 차곡차곡 담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납작해졌던 나의 마음 한편이 새로운 도시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폭신폭신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정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차가 가져다주는 이토록 달콤한 시간의 속도를 무르고 비행기를 선택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에든버러행 기차가 출발하는 킹스 크로스 역은 우리가 묵었던 숙소에서 매우 가까웠다. 기차에 올라 적당한 공간을 물색해 캐리어부터 내 몸에서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표시된 좌석번호를 더듬어 도착해보니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에든버러까지 네댓 시간 동안 얼굴을 마주할 맞은편 자리의 주인들은 이미 와 있었다. 맞은편 창가에 앉아있던 앳된 여대생이 밝은 얼굴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화사한 웃음이 그녀가 입은 아이보리색 스웨터만큼이나 따사로웠다. 금발 헤어도 한몫했지만 결정적으로 그녀의 얼굴은 배우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너무 닮아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후에 아들과 나는 그녀를 지칭할 때 본명과 무관하게 아만다라고 불렀다.


아만다의 옆자리, 그러니까 내 앞은 작은 체구의 파파 할아버지 차지였다. 한데 무슨 영문인지 할아버지는 아까부터 줄곧 서 계셨다. 그는 굼뜬 동작으로 호주머니 이곳저곳을 뒤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뭔가 성에 차지 않으셨는지 한 손에 들고 있던 편의점 봉지를 내려놓으시고는 주머니에 있던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와르르 쏟아 내셨다.


추측하건대 할아버지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상황이었고 보아하니 그것은 기차표일 확률이 높았다. 그 광경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던 나와는 달리 우리의 아만다는 마치 어린 손녀가 꼭 그러하듯 곁에서 할아버지를 돕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아만다의 수고가 무색하게 상황은 진전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이미 비워진 주머니를 손으로 더듬어가며 눈으로는 객차 바닥을 살피고 계셨다. 그런 할아버지 모습에 아만다와 나, 그리고 아들 녀석까지 합세한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테이블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고는 각자의 발아래를 확인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작정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객차 바닥을 연신 눈으로 되짚으며 복도 끝을 향해 가시더니 이내 페이드 아웃되었다. 남겨진 자들의 시선은 위스키 두병이 든 주인 잃은 편의점 봉지와 지갑을 포함한 소지품 일체가 어질러져 있는 테이블 위로 옮겨갔다. 기차 출발 시각이 임박해오고 있었다.


평온한 휴식은 물 건너갔음을 직감했다. 괜한 조바심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서로의 얼굴과 심란한 테이블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할아버지가 기차에 다시 오르셨을까요? 아무래도 승무원에게 말을 해야겠죠?"


나의 말을 들은 아만다 역시 쳐진 입술로 난처해하는 제스처만 취할 뿐이었다. 두 오지라퍼의 속을 알 리 없는 기차는 본래의 속도를 찾아 이미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눈을 돌려 차창밖을 바라봤다. 거기서는 또 다른 한 편의 영화가 막 상영을 시작하고 있었다. 방금 사정에 의해 일시 정지된 파파 할아버지 주연의 '내 기차표는 어디로 갔는가'와는 장르가 다른.


창밖에 펼쳐진 스크린에는 한참 동안 이렇다 할 스토리 전개 없이 재빠른 장면 전환만 반복되고 있었다. 잔뜩 찌푸린 날씨 탓이었을까. 이른 시각이 아니었음에도 시야에 들어오는 도심 풍경은 잠에서 덜 깬 듯 가라앉아 있었다.


모든 핑계를 날씨에 쏟아붓고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울 작정이었는데 등을 기대앉는 것조차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씬 스틸러이기도 했던 파파 할아버지가 언젠가의 내 할아버지를 떠오르게 했기 때문일까. 테이블에 쌓여있는 주인 잃은 소지품에 자꾸 시선이 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비로소 우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가움과 안도감도 함께 왔다. 할아버지께서는 잠시 손이라도 닦고 오신 양 아무일도 없다는 듯 털썩 자리에 앉으셨다. 옆에 있던 아만다의 질문이 바로 이어졌다.


"할아버지 기차표는 찾으신 거예요?"


파파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스윽 일어나셨다. 그리고 바지 뒷주머니에서 기차표를 꺼내어 흔들어 보이셨다.


"떨어뜨린 게 아니었어. 티켓은 아까부터 바지 뒷주머니에 있었지"


기차표는 처음부터 한 번도 손이 닿지 않았던 뒷주머니에 있었던 것. 아만다와 우리의 염려를 알 리 없는 할아버지는 표정 변화 없이 늘어져있던 소지품을 주섬주섬 챙겨 넣으시더니 비닐봉지 안에 있던 위스키 한 병을 움켜 잡으셨다. 위스키 병이 열리는 경쾌한 소리는 마음 졸이며 지켜보던 관객들에게 드라마의 갈등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아만다와 나의 마음에 쓸데없는 조바심을 키우고 과몰입하게 만들었던 이 노년 배우의 무심한 듯 쿨한 연기는 단연 만점이었다. 머쓱함에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는 내 앞에서 위스키 두세 모금을 홀짝이던 할아버지는 마시던 병을 들고 다시 한번 복도 끝으로 총총 사라졌다.


기차에 오르고 한 시간여 만에 비로소 편안한 자세로 등을 기대어 보았다. 규칙적이며 익숙한 기차의 소음도 귓전에 닿았다. 아들 녀석은 좀 전까지의 상황이 흥미로웠는지 할아버지가 사라지자 또다시 키득거리고 있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다시 얼굴이 밝아진 아만다도 준비해온 샐러드와 요구르트를 꺼내어 아침을 대신할 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오우 마이갓, 스파이더! 스파이더! 썸바디 헬미!! 오우마이 갓!!"


이것은 대관절 어떤 영화의 첫 대사란 말인가. 누군가 두 귀에 쏙쏙 꽂히는 다급한 외침을 반복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우리의 아만다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비명이었다. 그녀의 외침에 깜짝 놀란 나는 덩달아 소리부터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아만다의 흰 스웨터 위를 지나 목덜미를 향해 올라가고 있던 시커먼 거미를 발견했을 때 나는 얼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앞에 있는 아만다를 향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어릴 적 아이에게 읽어주던 그림책에서나 봤던 바로 그 거미였다. 굳어진 몸으로 찰나의 순간에 난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매우 새까맣고 꽤나 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만다의 몸에 더 이상 거미는 없었다. 재빠른 손이 거미를 낚아채 객차 바닥에 내동댕이 쳤던 것이다. 나의 의지와 달리 어느새 바닥을 따라간 나의 시선의 끝에는 거무튀튀한 뭔가가 동그랗게 말려져 있는 것이 나뒹굴고 있었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단번에 거미를 제압함으로써 긴박했던 상황을 종결한 우리 구역의 영웅은 복도 건너 앉아있던 점잖은 중년의 아저씨였다. 한동안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했던 아만다는 뒤늦게 본의 아니게 소란의 주인공에 된 것에 대해 부끄러워했다. 위기에서 구해준 아저씨께는 감사의 말을, 주변 승객들에게는 뒤늦은 양해의 말을 전했다.


아들 녀석이 사색이 된 것은 오히려 그때부터였다. 평소 동물이나 곤충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녀석이지만 유일하게 몸서리치도록 싫어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거미였다. 방금 본인의 눈앞에서 유명을 달리한 거미의 친구 혹은 가족이 분명히 주변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라도 있는 듯 연신 발아래, 창가 옆, 의자 틈새를 비롯해 몸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을 나의 눈과 손까지 빌려가며 샅샅이 살핀 후에야 마음을 놓는 듯했다.


거미 한 마리가 만들어낸 해프닝을 겪었던 순간은 우리를 포함한 일대의 승객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아이스 브레이킹의 시간이기도 했다. 주요 장면과 관전 포인트를 놓친 승객들을 위해 다른 이들은 일일이 조금 전의 상황을 공유하느라 잠시 술렁였다. 가여운 아만다에게는 걱정과 위로의 말이 한 마디씩 날아왔다.


소동을 겪은 후 한참만에 아만다는 그때까지 한술도 뜨지 못했던 샐러드를 챙겼다. 아보카도를 능숙하게 해체한 후 샐러드에 섞어 야무지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게도 허기가 엄습해왔다. 우리도 준비해온 음식을 테이블에 펼쳤다.


아침식사를 못하고 체크아웃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카페테리아 아주머니께서 머무는 내내 기숙사 최연소 투숙객이었던 아들을 위해 약간의 빵과 과일, 주스와 삶은 계란 등을 챙길 수 있도록 해주셨다.






기차는 꽤 오랫동안 내륙을 가르고 있었다. 이동 중 잠시 날이 개어 차창 안으로 고마운 햇살이 내려앉았다.


허기만 달랠 수 있을 정도의 소소한 먹거리였으나 예쁜 누나와 마주 앉아 도란도란 함께한 아침은 녀석에겐 특별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참 후에 안 사실이지만 이날 에든버러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났던 샐러드를 오물거리며 예쁘게 먹던 이 앳된 여대생으로 인해 나의 아들 녀석은 영국 여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편견에 톡톡히 빠지게 되었다. 아만다 누나는 너무 예쁜 사람이었노라 아빠에게 귀띔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 들었다.


아만다는 본가가 있는 런던에서 주말을 보낸 후 학교가 있는 에든버러로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에든버러에 있는 대학을 가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에든버러의 자연환경이 큰 몫을 차지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자신이 다니고 있는 대학 캠퍼스도 무척 아름다우니 구경하러 오라는 말도 보탰다.


우리 테이블에서 음식과 이야기가 오고 갈 때 파파 할아버지께서 자리로 귀환하셨다. 안색을 보아하니 좀 전에 할아버지 손에 들려있던 위스키는 이미 할아버지 위장을 통과한 것이 분명했다. 뚝뚝하고 눈도 잘 맞추지 않으시던 모습은 간데없었고 반색을 하는 발그레한 얼굴에서는 전에 없던 다채로운 표정들이 보였다.


나의 아들 녀석을 향해 마치 손주를 보듯 지긋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할아버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때마침 삶은 계란을 먹으려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아이는 익숙한 듯 삶을 계란을 머리로 가져가 '툭!' 하며 우리에겐 너무도 흔한 '계란으로 머리 치기' 기술을 선보였을 뿐인데, 이 광경을 본 할아버지께서는 세상 즐거워하시며 껄껄 웃으셨다.


취기가 더해져 무릎까지 치시며 소란하게 웃으시긴 했으나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적지 않은 나날을 사는 동안 머리를 이용하여 계란 껍데기를 벗기는 모습을 난생처음 본게 아닐까 싶다. 한참동안 계속된 유쾌한 웃음을 거둔 파파는 남은 위스키 한 병을 챙겨 다시 한번 자리를 벗어나셨다.


기차는 스코틀랜드를 향해 영국 동부의 정해진 선로를 따라 열심히 올라가고 있었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탁 트인 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북동부 해안을 달리는 구간이 시작된 것이다. 오늘 아침 머릿속에 그리던 고요한 해안가 풍경 그대로였다. 몽글몽글한 구름은 여차하면 해수면에 닿을 듯 낮게 깔려 있었다.


에든버러로 향하던 이 날 기차에서 보낸 시간은 첫 순간부터 시선을 뺏는 자잘한 이벤트의 연속이었다. 세 시간 남짓 테이블을 셰어 했던 소란한, 그러나 사랑스러운 동행들로 인해 내가 소망하던 나른하고 게으른 휴식은 얻지 못했으나 눈앞의 바다가 모든 것을 보상해주었다.  


해안가가 보인다는 것은 에든버러가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오른쪽 창가를 택해야만 잠깐이나마 영국 동부의 해안을 함께 달리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유 세이브 마이 라이프, 땡큐 쏘 머치"

에든버러 웨이벌리 역으로 기차가 미끄러질 즈음이었다. 사랑스러운 우리의 아만다는 자신을 위기로부터 구해준 건너편의 영웅을 향한 마지막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엔딩에 걸맞는 대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를 태운 기차는 긴 호흡을 내뿜으며 웨이벌리 역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웨이벌리 역사를 빠져나오며 녀석은 이내 '우와~!' 하는 탄성을 숨기지 않았다. 일순간에 드라마틱한 올드타운의 스카이라인에 압도되고 말았던 것이다. 


첫 만남부터 시선을 빼앗아버린 이토록 고풍스럽고 기품 있으며 중후하기까지 한 이 도시에는 과연 어떤 드라마가 숨겨져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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